젊은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 part.2
쉬는 날이기에 다시금 펴는 Part.2이자, 본서의 내용상 네번째 편지이다.
총 37개의 편지 중에서 한창 초반이지만, 매번 본서를 펴며 느끼는 건 각 편지마다 그저 그런 일상을 담은 것이 아니라 나름의 인사이트들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오늘 정독했던 내용의 가장 기억에 남는 점은 바로 이것이다.
목사의 과제는 양서류처럼 이 두 세계에 동시에 사는 것인 듯하다. … 두 세계가 서로를 배척하는 듯 보이고, 나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일반적으로 목사는 두 세계 모두에서 편안해지는 법을 배우는 양서류라는 생각이 든다.
'목사의 과제'와 '양서류'라는 단어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잘 표현했을까 싶을 정도. 이 대목에서 나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과연 나는 이 두 세계를 배척하지 않고 선택하지 않고, 잘 살고 있는가? 하늘의 시민권과 이 땅에서 대한민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 잘 살고 있는가?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명확히 정리되지 않아 사실 글을 쓰는 내내 답답한 마음이 크다.
잘 사는 것?
하늘나라의 시민이기에 이 땅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늘나라의 시민이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 땅에 푹 빠져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혹 이것이 아닐까?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두 세계의 왕되신 주님께 받은 사명을 따라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써의 삶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속과 겉이 다른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속에 분명한 사명을 붙들되 겉으로 이 세상에 적응하면서 자연스레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 속이 변하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너무 유별남으로써 세상이 마냥 기피하는 대상이 아니게 말이다.
혹 그 속에 있는 사명을 건드는 영역에서만큼은 적응과 자연스러움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 본서의 저자가 말한, 두 세계 모두에서 편안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속에 있는 분명한 사명을 가진 자가 겉의 여러 요소에도 흔들리지 않고 온유하게 살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 같다.
바로 이러한 것이 잘 사는 것 아닐까?
거룩하신 주님, 오늘도 제 자신을 먼저 내려놓고 돌아보며 주의 말씀을 붙들려 합니다.
멋진 믿음의 선배가 말했던 '목사의 과제',
주님 보실 때 저는 그 과제를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네, 제 스스로가 볼 때 균형잡는 게 쉽지 않은 듯 합니다.
이 과제를 감당키 위해 저에겐 더 큰 온유와 말씀이 필요합니다.
저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하루하루 먼저 제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 부르신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여 주옵소서.
여전히 말씀을 붙드는 부분이 연약합니다. 다시금 회복시켜 주옵소서.
인격과 말씀이 합을 이루어 제게 처음주신 그 마음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 있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