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5장 3-8절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온 형제들을 만난 요셉. 그는 형제들을 시험한다. 다행히도 형들은 예전과는 다르게 동생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것을 보며, 이제 자신을 드러내도 되겠다고 느낀 것인지 정체를 드러낸다. 요셉의 깜짝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제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해 한다. 이에 요셉은 오랜만에 만난 자신의 형제들 앞에서 자신을 ‘팔린 자’라고 표현하며 다시금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동시에 자신이 현 자리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드러낸다.
본문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엿볼 수 있다. 요셉이 했던 말들을 살펴보자. 그는 형제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때 우선적으로 이름을 언급하되, 이어지는 내용은 ‘애굽에 판 자(4)’였다. 이러한 요셉의 표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형들을 겁주기 위한 목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한 번에 자신을 잘 알아보지 못하자 정신 차리고 똑바로 알아보라고 강력하게 어필한 것인가? 이것에 대한 답변은 이어지는 5절을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5절 초반부는 요셉의 표현으로 말미암아 걱정, 근심할 수밖에 없는 형제들을 위한 말일 것이다. 형제들은 과거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당장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동생에게 복수를 당할까 떨 수밖에 없는 갑(을병정)가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5절의 후반부이다. 요셉의 고백을 보자.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 보내셨나이다.” 그러니까 요셉이 4절에서 자신을 ‘애굽에 판 자’라고 고백한 것은 문자 그대로, 요셉 자신이 애굽 땅의 총리가 된 것은 비록 형들의 만행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그 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시선으로 현 상황에서 두려움에 떨지 말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요셉에게는 삶을 통해 깨우친, 형제들이 바라보지 못하는 영적 통찰력과 탁월한 안목이 있었다.
이러한 요셉의 당부는 4, 5절에서만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본문 하반절에 동일한 의도가 더 깊게 나타난다. 7절에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것은 ❶조상들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따라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❷후손들을 번창케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8절은 이를 요약하듯 ‘그런즉’이라는 접속사를 통해 정리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자신이 애굽까지 오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❶바로의 아버지로, ❷온 집의 주로, ❸애굽의 통치자로 삼으신 것이다. 이러한 요셉의 말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지만, 결국 조상 때부터 약속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왕이라 부르는 바로조차 자신의 통치 안에 있음을, 그를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결국 요셉이 본문의 앞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진짜 왕”이라는 것이다. 왕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분의 섭리를 보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모습에서 삶의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요셉이 자신을 버린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감정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영적인 통찰력과 탁월한 안목을 겸비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람을 움직이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문제가 많은 세상일지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움직여지고 있는 것이며, 아무리 하찮은 자나 혹은 왕일지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세상을 말씀으로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지금 현재 세상을 바라보자. 어떤 생각이 드는가? 지금의 내 모습을 바라보자. 어떤 생각이 드는가? 정말 답이 없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네의 모든 것들을 직시했을 때 결론은 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너머로 작은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계시기에 오늘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으며, 더 나아가 약속하신 저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소망마저도 우리가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그 작은 빛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아무런 의미 없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 빛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덕분이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대신해 그 작은, 좁은 빛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기에,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어둠의 권세를 뚫고 천국으로 가는 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이다(창 3:24). 앞서 애굽으로 보내셔서 갖은 고생 끝에 총리의 자리에 올라 가족들을 식량이 풍부한 곳으로 인도했던 요셉처럼,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자, 형제로 삼아주신 예수님께서 계셨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는 바, 이 세상과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때 답이나 소망이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망원경을 통해 보여 지는 “왕 되신 하나님”.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힘든 삶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답이 아닌 하나님을 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답을 찾지 말자. 예수 그리스도를 찾자. 작은, 좁은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 오늘도 답을 찾지 않고 주님을 찾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