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아프다.
아프다. 이 한 문장이 지금 나의 심정이며,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사역을 내려놓은 지 언 5개월 되어가는 지금까지, 사역을 통한 깨달음을 누릴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에게 동역자들의 사역이야기를 듣게 하심으로 간접적으로나마 깨달음을 주고 계셨다. 안타깝지만 동역자들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대다수는 나에게 있어, 아니 우리들에게 있어 반면교사로 삼을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그래, 사역자를 떠나 나름 긍정적인 사람이기에 어떤 이야기라도 나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하려 노력하곤 했다. ‘그래서 하나님, 여기에서 저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 답을 못 찾을 때는 하나님께 여쭙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것조차 너무 힘들다. 왜냐하면.. 가슴이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미리 말하지만 나의 동역자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요즘 동역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역의 피드백은 99%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만이 언급된다. 그것도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답이 없는 이야기이다. 교회의 다양한 문제점들. 그것도 사역자들의 문제들이니 같은 사역자로써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차마 이 글에서 조차 담을 수 없다는 이 현실이 정말이지 너무 아프다. 사역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인가? 이 글을 빌어 하나님께 정말 상소를 올려드리고 싶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두렵다. 혹시 나도 그러한 사역자가 될까. 지금 나의 분노와 눈물만을 볼 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같지만, 사람 일은.. 정말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이야 알았겠는가? 자신들이 그렇게 타락할 줄을. 아니 지금 혹시 그들의 현실을, 상태를 알고는 있는 것인가? 그들이 하고 있는 언행들을 말이다. 정말 아프다. 너무 아프다. 항상 동역자들의 아쉬운, 안타까운 이야기들을 할 때 마다 왠만하면 사역자의 편에서 맞장구를 쳐주며 안타까움을 함께 토로하고 했던 나였는데, 더 이상 맞장구조차 쳐주지 못하고 있다. 나마저 그렇게 말한다면 너무 슬퍼지니까. 내 스스로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서 더 슬프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순간이라도 더 고민해야 할 내가 이러한 안타까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 사역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현실은 알곡과 가라지를 거르고 있는 과정 중에 있다고. 이러한 한국교회의 현실에 과거와 같은 부흥이란 볼 수 없다고. 순간 나는 욱해서 이렇게 반응했다.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물론 가능성이야 희박하지. 하지만 0.2%라고 했을 때 그 말인즉 가능성은 존재하는 거야”라고 말이다. 그리고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그의 책 ‘부흥’에서 말씀하셨던 것을 나누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생각나는대로 기록했다.)“왜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때의 하나님이 지금은 다른 분이 되셨습니까?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 요즘 난 목사님의 이 말이 너무나도 고프다. 확률과 가능성으로 볼 때 정말 희박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과연 하나님을 믿는 자의 사고방식이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에 나는 안타까운 현실을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려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에 모든 것을 맡기려 한다. 도무지 인간의 사고로는 답이 없기에, 아프기만 할 뿐이기에
“하나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 아픔을 하나님께서 누구보다 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픔에 따른 소망의 갈급함을 보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아픔이 한국교회 회복의 시작점이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통해 저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온전한 노예로 인도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보며 긍휼히 여기셨던 그 마음을 저 또한 갖게 하시며 계속해서 이 땅을 위해, 한국교회를 위해, 더 나아가 이 땅에 많은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소서.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