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eoulos
출애굽기 28장 40-43절 본문
40.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띠를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
41.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
42.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1. 관찰: 본문 요약
레 28장 전체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서 입어야 할 예복(흉패, 에봇, 겉옷, 반포 속옷, 관, 띠)에 관한 규정을 말하고 있다. 본문 앞에서 대제사장 아론의 옷을 말했다면 40절은 아론의 아들들이 입을 옷에 대해서 말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위한 속옷, 띠, 관을 만들라고 하시는 것인가? 바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마음이 부패한(렘 17:9) 죄인이다(롬 3:10). 이러한 존재는 결단코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예를 들어 상견례의 자리에 나간다고 생각해보자. 신분의 귀천을 떠나서 몇 일간 세탁하지 않고 오물이 묻어있는 옷을 입고 그 자리에 나갈 수 있는가? 상견례 자리에 맞는 격식을 갖춘 예복이 필요하다. 운동선수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서 청와대에 초대를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평소 훈련하면서 입었던 땀에 떨어있는 옷을 그대로 입고 그곳에 나아가겠는가? 이는 남녀노소 귀천에 상관없이 어떤 자리에 나아간다면 적어도 그 자리에 맞는 격식을 차리는 것이 일반 상식일 것이다. 제사장의 직분도 동일하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아들들이 영화롭고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해 준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41절에 보면 이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들이 제사장의 거룩한 예복들을 갖춰 입고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42-43절도 동일한 원리 가운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이들의 더러운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할 것을 배려하셔서, 이들이 죽지 않고 맡겨진 직분을 잘 감당케 하기 위해서 명령하신 것이었다.
#2. 해석: 본문 연구
인류 최초의 범죄가 드러난 에덴동산에서의 퇴출이후, 인간은 죄인이 되어 하나님 앞에 결코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에서는 인간을 버릴 수 없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녀삼아 주셔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그것이 바로 제사장 제도이다. 비록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구별된 자를 택하셔서, 그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속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번거롭고 복잡하더라도 이렇게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은 유일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기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만 했다. 이스라엘 이외 다른 족속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도, 그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었지만 이스라엘만 유일하게 하나님을 신으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족속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하나님은 너무나도 거룩하시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야만 했다(빌 2:12).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 아무리 두렵다할지라도 그분이 하나님이라면 그 앞에 나아갈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4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홍해를 가르면서 각종 표적과 기사로 자신들을 구원해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신이라면, 믿고 따를만하지 않겠는가? 그 분 앞에 나아갈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위에서 말했듯이 아무리 부담되고 준비할 게 많다하더라도 청와대에 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누가 마다하겠는가? 더 나아가 주거나 재정적인 부분에 있어 부담이 된다하더라도 세계적인 석학 밑에서 배울 수 있는 유학의 기회가 있다면 그 누가 마다하겠는가 말이다. 하물며 생명을 구해주신 분이라면 그 분이 누군가를 떠나 충분히 만나볼만 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오히려 만날 수 있게 하심에 감사한 것이 보통 사람의 생각일 것이다. 이스라엘도 이와 동일했다. 특별히 제사장은 그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자였다.
이러한 기회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말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은 모두 ‘만인제사장설’이라 불리는 원리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예수님께서 초림하시기 전만해도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사장을 통해 제사를 드리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제사장이자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셔서(요일 2:2) 구약의 제사 제도는 폐지되고(마 27:51),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디로 더 이상 본문에서와 같이 구별된 몇 사람만 제사장의 형태로 옷을 갖춰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면 그분의 의를 힙 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자유해졌는가?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그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이제 그마저도 형식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세상의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의 권세와 싸우며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럼 구원받기를 포기하세요.” 구원이라는 것이 무슨 장난감인가? 내가 힘들면 언제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포기할 만큼 그렇게 가벼운 것인가? 그렇게 가벼운 것이라면 예수님은 도대체 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포기하고 이 땅에 내려와 자신이 만큼 피조물들에게 갖은 모욕을 겪어가며 죽임을 당한 것인가? 인간의 구원이란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에, 무게감 있는 것이기에 예수님 또한 그렇게 하기를 작정하신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에서 이스라엘에게 강조하신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할 때 너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여겨 나의 백성으로 삼아주겠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에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2가지 영적 원리를 기억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갈 때 ①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오늘 날 우리의 모습은 구약의 제사장들과는 다르게 분명 자유로워졌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자유롭게, 언제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여쭤보며 잦은 교제를 나눌 것 같지만 실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게으르며 잘못된 모습들이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이 당시 이렇게 철저한 규율과 법도가 있었기에, 자칫하면 죽을 수 있는 긴장감 속에 모든 예식들이 거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예배자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준비되지 않은 모습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간다. 예배 시간에 늦는 것은 기본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은 어느새 잊어버려 헌금내기를 아까워하고, 자신의 여가생활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섬기는 시간을 아까워한다. 과연 예배드리기에 앞서 기도로 준비하는 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주일 전날 헌금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적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한 주간 죄악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드릴 예물은 미리 구별해놓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시대는 흘렀으나 우리는 제사장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뜻을 통해 영적 원리를 기억해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②지극히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제사장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은 ‘예복’이었다. 이 예복이 도대체 어떻길래 입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인가? 좋은 재료로 만들기 때문에 옷이 거룩해지는 것인가? 아니다. 물론 좋은 재료들로 만드는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원재료나 만드는 방법이 특별하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즉 거룩하게 여겨주시기 때문에 거룩한 옷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제사장들도 동일하다.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은 그들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그냥 선택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제사장 옷의 규율을 주신 것은 이들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셔서 죄악을 가려주시기 위해서였다. 죄악이 가리워져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동일하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해 전가 받은 의의 옷을 입어 의인이 된 게 아니라, 거룩한 옷을 통해서 죄가 가려져 의의 옷을 입은 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은 지극히 수동적일 뿐,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3. 적용 및 결단
이러한 사실 앞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예배드려야 하는 것인가? 다시 한 번 2가지를 기억하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덕분이다. 그분으로 인해 우리가 아직 죄인이지만 의의 옷을 입어 하나님 앞서 의인의 모습으로 서게 된 것이다. 또한 구약과는 다르게 언제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은 자유로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깊은 교제를 나누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이에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자유라는 방종에 빠지지 말고 더 철저한 모습으로, 갖춰진 모습으로 예배의 자리에 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