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eoulos

사도행전 6장 8-15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6장 8-15절

텔레울로스 2019. 8. 25. 23:25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8, 10절은 스데반의 사역들이 온전히 성령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성령님의 강한 역사하심에 자유민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자, 본격적으로 사악한 방법으로 스데반을 올무에 빠뜨리기 시작한다. 이들은 거짓 증인을 세워 모함할 뿐 아니라, 아예 공회에 세워 스데반을 유대법에 의해 심판하려 한다. 유대법에 의하면 거짓 증인을 세운다는 것은 사형과도 같은 죄목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이들은 정녕 스데반을 가만히 두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스데반의 표정이 아주 놀라울 뿐이다. 그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살펴봄에 있어 우선적으로 행 4장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미 행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장소인 공회에서 승리한 바가 있다. 단순히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들까지 있던 유대인들 앞에서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온 것이다. 사도들은 돌아와 그들의 동역자들과 함께 그 당시의 승리의 기쁨을 나눴다. 아마 이때, 스데반도 동참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들은 다함께 29-30절을 기도하고 31절과 같이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러 나아가기 시작했다. 스데반은 아마 공회에서 두려움에 떨기보다 그 당시 베드로와 요한이 승리했었던 상황을 떠올리며 29절의 기도문을 읊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승리함으로 이들 또한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결과를 낳은 것처럼, 스데반 또한 이 자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기대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필자 생각에 아마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스데반에게 임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스데반이 바라본 그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했기 때문이다. 실제 기독교는 스데반의 죽음을 계기로 전 세계에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비록 그의 죽음을 보며 두려움으로 인해 사람들이 열방으로 나아간 것이지만, 하나님의 넓은 섭리 안에서 분명 스데반의 이 사건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처럼 스데반은 이 상황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바라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자리에서 자신이 죽게 될 것을 바라보았을 테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도구로 살아가게 된 것에 감사하며 이 상황을 되레 기회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후에 스데반이 죽음에 이르게 될 때 그의 마지막 외침은 예수님과 같이 끝까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죽음을 직감했었을 것임에도 바로 눈앞에 있는 상황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았다. 아니, 더 나아가 그는 바로 눈앞에 있는 상황을 보고도 두려움에 떨지 않고, 이 상황을 기회로 여기도 복음을 담대하게 전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스데반의 모습을 놓고 봤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떠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우리들에게 스데반과 같은 모습이 있는 것인가? 위기의 상황, 나에게 처해진 순간 속에 함몰되어 하나님을 바라보기는커녕, 불평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세상을 바라보면 바로 눈앞에 있는 것들만을 바라본다면, 이 세상을 봤을 때 결코 우리는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 세상은 타락하고 더러워졌기 때문에. 하루하루 터지는 여러 가지 기사들과 세상의 흐름은 반 기독교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회, 신학교 할 것 없이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은 우리의 얼굴에서 눈물만 나오게 할 뿐이다. 그 어디에도 우리에게 웃음을, 천사의 얼굴을 가져다 줄 소식은 기다리지 않는다. 다만, 유일하게 우리가 웃을 수 있는,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을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맛 볼 때이다. 그 때가 기도의 시간이든 말씀의 시간이든, 예배의 시간이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만이 유일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본다. 필자 또한 요즘들이 건강상의 이유로 운동하고 따뜻한 물로 샤워할 때 너무 행복하다. 단순히 육이 건강해진다는 것을 넘어 심적으로도 회복되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은 천사의 얼굴까지는 아니다. 그 다음 단계가 기가 막힌다. 깔끔하게 샤워하고 바로 가는 곳은 바로 기도실이다. 이 때 기도실에서의 내 마음은 세상 다 가진 듯 한 평안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때의 표정은 마치 스데반이 가졌던 그때의 그 표정이 아닐까 스스로 생각을 해본다. 비록 스데반 집사님의 상황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얼굴은 어떠한가? 상황에 함몰되어 짓눌린, 답이 없는, 허무맹랑한 표정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세상이 주는 행복이라는 근거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 안 된다. 천사의 얼굴은 결코 세상이 주지 않는다. 이에 우리는 더 이상 흔들리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 얼굴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산과 같이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평안함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얼굴이 바뀌는 사람들이 되야 할 것이다. 그 분 앞에 설 때, 우리는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고 어려울 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스데반과 같이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다. 그 분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기쁨을 맛볼 수 있을 때 말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갖게 될 것이다. 스데반이 보았던 그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를 우리가 볼 것이고, 우리 또한 스데반과 같이 그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게 될 것이다.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참된 평안과 기쁨을 릴 수 있다.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7장 54절 - 8장 1절  (0) 2019.08.25
사도행전 7장 51-53절  (0) 2019.08.25
사도행전 6장 1-7절  (0) 2019.08.25
사도행전 5장 33-42절  (0) 2019.08.25
사도행전 5장 17-32절  (0) 2019.08.25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