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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장 54절 - 8장 1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7장 54절 - 8장 1절

텔레울로스 2019. 8. 25. 23:35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스데반의 설교를 듣게 된 유대인들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날선 검보다도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관절과 골수를 쪼개버릴 뿐 아니라, 양심을 찌르자 그들은 분노에 사로잡혔다. 더욱이 복음을 선포할수록 더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스데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인자를 이야기하자, 그들의 분노를 결국 터져버렸다. 그들은 괴성에 찬 함성으로 복음듣기를 싫어해 귀를 막고 스데반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쫓은 후, 돌로 쳐 죽이려 했다. 하지만 스데반은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부르짖으며 예수님께 기도했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고 결국 죽게 되었다. 그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단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오늘의 본문은 복음을 선포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와 복음을 싫어하는 사단의 노예들 간의 갈등을 아주 첨예하게 그리고 있다. 그 내용으로 스데반 집사의 최후가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스데반의 설교에 진절머리가 난 것인가? 얼마나 듣기 싫어했으면 죽이기까지 한 것인가? 유대법에 의하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만한 잘못을 한 것인가 의심스럽다. 스데반이 공회 끌려온 것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자유민들과의 논쟁에서 정당하게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유대인들이 지은 죄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스데반이 선포한 복음은 이들의 마음에 찔림을 가했고, 결국 죽음을 자초했다. 결과적으로 설교 한편 했다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정말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인데, 그 가운데 마지막 절은 종지부를 찍고 있다. 스데반의 죽음이 당연하다? 이 어찌된 일인가!
현대 많은 사람들은 복음 듣기를 싫어한다. 문을 닫는다. 마음을 닫는다. 귀를 닫는다. 관계를 아주 끊어버린다. 복음을 들이대면, 자연스레 오는 반응이 이렇다. 그러다보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전하기를 꺼려한다. ?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과연 이러한 현실이 성경적인가? 오늘 본문을 봤을 때 결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싫어한다고 전하지 않는다? 스데반은 그것을 몰랐을까? 사람들이 싫어함을 알았음에도 전했다. 오히려 그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이 깃들자 더 기쁨으로, 열정적으로 전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지만, 그리고 그 죽음을 당연하게 바라본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차원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데반의 죽음은 8:1b에 나오는 아름다운 결론을 함께 낳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복음을 싫어한다. 그리고 싫어하는 것을 했을 때 남는 것은 그에 응당한 대가이다. 이러한 원리는 당연했다. 그것을 8:1a에서 사울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싫어하잖아, 유대에서는 불법이야, 남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에서 이러한 원리를 찾는 사울의 모습과는 반대로 8:1b를 보며 이러한 원리를 찾아야 한다. 주님이 기뻐하시잖아, 기독교에서는 명령이야, 남는 것은 열매라고!”

 

사람들이 싫어할 것을 마땅히 여겨 복음을 내려놓고 잠자코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명령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마땅히 여겨 복음을 붙잡고 전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다음 단락을 보면 사울은 그가 배운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간, 소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따르는 종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스데반의 죽음은 마땅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진리에 의해서도 스데반의 죽음은 마땅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은 많은 열매를 맺게 만들기 때문에. 주님의 삶이 그러했듯이 우리 또한 그렇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 허락된 진리를 마땅하게 따르고 있는 것인가? 열매 맺을 것을 기대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인가? 거짓된 종교를 따랐던 사울도 자신의 종교관을 마땅히 여기며 살아가는데, 과연 우리는 진리를 마땅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오늘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해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마땅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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