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eoulos
예수를 만나다 (Part 7) 본문
"무익했나 싶지만 유익"
이번 단락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 다룬다. 사실 승천은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한(!?) 주제 중 하나라고 생각이 된다. 이러한 생리를 잘 알고 있던 팀 켈러이기에 초반부터 명확한 질문을 던진다. ‘승천이 우리의 구원이나 살아가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것은 금세 또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특별히 이 주제는 본문을 가지고 나누기보다는 신학적인 이야기를 통해 풀어내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승천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예수님의 천상 복귀를 넘어, 새로운 즉위식이자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공간을 자유로이 오고가셨던 것처럼, 한 순간에 승천하셨어도 되었을 일이다. 그러나 굳이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 속으로 올라가셨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던 것이고, 팀 켈러는 이것을 대관식이라고 비유하며 영어 단어 ‘ascended’로 설명한다. 그러면서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잡았던 사건을 덧붙인다(요 20:17). 예수님께서는 왜 자신을 붙잡는 마리아를 향해 ‘나를 붙들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을까? 어찌보면 예수님치고(?!) 너무 냉정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승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 말은 냉정한 것이 아닌 마리아에게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육체는 하늘로 올라가지만, 그분의 통치는 우주적인 범위를 지니기 때문이다. 승천이 이 땅에서 그분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확대와 무한한 접근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이 땅에 성령께서 오시기에 마리아는 예수님과 한층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주님은 우리 눈앞에서 승천하셨고 우리는 뒤돌아서서 눈물을 흘렸지만, 이윽고 주님이 우리 마음 속에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특별히 팀 켈러는 엡 1:22,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의 표현에서 전치사의 번역을 달리하여 ‘교회를 위한 머리로 삼으셨느니라’라고 해석한다. 동시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46번에 근거해, 예수님의 승천은 먼저 그의 왕되심이 우주적으로 선포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밝힌다. 바로 이것이 승천의 의미인 것이다. 어찌하여 우리의 삶의 방식에 영향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앞서 이야기했듯, 승천이라는 단어가 많이 가려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승천이 가려졌다기보다는 ‘성령을 보내주심’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던건 아닌가 싶다. 팀 켈러의 풀어내는 방식을 보면 일정 부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면, 승천에 내포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왕되심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주 간과하는 ‘왕되심’. 이번 단락을 통해 다시금 생각하며, 그 왕되심이 동시에 나를 위한 것에 오늘을 감사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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