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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민감함에 대한 고찰

텔레울로스 2022. 10. 26. 19:00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는 '인본주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한 하나의 반증은 무수하게 쏟아져 나오는 심리학 서적들과 그에 따른 뜨거운 반응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만큼 사람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것을 넘어 민감하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을 위한 섬세한 심리학'이라 하여 민감한 사람들을 위한 서적이 따로 출판되었겠는가?(아마도 보다 전문적인 서적들이 더 많을 것이다) 오늘은 '민감함'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민해보려 한다.

 

민감함이라는 단어는 그저 세 글자이지만, 정말 복잡한(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표현에 한정)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가? 그 사람마다 민감함은 다 다를 것이다(여기에서 '다'라는 뜻은 그 다름을 수치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민감한 편에 속한다(물론 이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이다). 그래서 좋기도, 어렵기도 하다. 먼저 어렵다는 것은 숨가쁘게 돌아가는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피곤함을 뜻한다. 차라리 둔했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겠으나 민감하기에 재빨리 인지하게 되고 즉각적으로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이는 관계적으로나 업무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그렇다. 그러나 그만큼 좋은 점은 한 발 더 먼저 생각하기에 신중을 기할 수 있고, 재빨리 흐름(개인 혹은 분위기)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한때, 나의 민감함으로 나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많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물론 여전히 종종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민감함 또한 나 자신이 만들어낸 성품이 아니라, 머릿털까지 세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창조이기에 부정적으로 여기며 내가 밀어내야 할 것이 아니라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왜 민감한 것인가?'가 아니라, '이 민감함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받아들이는 것과 반응하는 것으로 나눠 생각해야 한다.

 

먼저 '받아들이는 나'는 감각적으로 들어오는 정보들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앞서 나눴듯이)민감함마저 하나님께서 주신 성품이기에, 이마저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정보로 알되 성령의 조명하심 가운데 분별하여 받아 들이는 것이다. 특별히 목회자로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 이는 (비록 피곤하지만...)성도들의 마음을 알고 이 시대를 한 발 먼저 바라볼 수 있기에 정말 큰 도구이다. 사실 요즘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성령의 조명하심 가운데 정보를 받았다면, 성경에 입각해 받은 것을 하나님께 묻고 이를 잘 풀어 다시금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반응해야 하는데 핵심은 '어떻게 드러내냐'는 것이다. 이 부분이 (내게도)어려운 이유는 받는 것이야 지극히 나 혼자만의 영역이지만, 드러내는 것은 상대방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직설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물론 보다 더 우선적인 원칙은 성령의 감동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하루하루 정신 없는 요즘을 살아가고 있지만, 오늘 이 글을 쓰게 되는 것도 더 넓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당장 이 민감함을 내가 어떻게 안고 가야 할 지, 조금 더 편하게 말하자면 어떻게 살아내야 할 지 고민하게 되는데 그 시작은 (역시나)가정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나의 이런 성품이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이 가정이기에, 나의 최우선적인 사역지가 가정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만)요즘들어 목회자라는 타이틀이 내게는 참 무겁다. 당장 선포하는 말씀조차 내 삶에서 얼마나 씨름하냐고 물어본다면 사실 대답조차 할 자신이 없다. 그저 하루하루 말씀을 준비하는 것 자체로 버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 몇 년동안의 내 삶을 돌아보면, 비록 더딜지라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오늘의 이 글 또한 내 삶이라는 전체 퍼즐의 정말 작은 한 부분으로 생각된다.

바라기는 이 글이 그저 나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복잡함을 정리하는 하나의 작업이 아니라, 진정 나를 돌아보며 모난 부분을 다듬어가는 성숙의 과정이 되길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소망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시 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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