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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2장 25절 - 13장 3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12장 25절 - 13장 3절

텔레울로스 2018. 3. 20. 09:58

사도행전 12장 25절 - 13장 3절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베드로의 사건에 이어, 일전에 흉년으로 인해 부조를 모아 예루살렘으로 들고 갔던 바나바와 사울이 다시 등장한다. 이들은 부조하는 일을 끝낸 뒤, 그곳에서 마가를 만나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13:1은 이방선교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안디옥 교회에서 섬기는 자들의 명단을 언급하고 있다. 그곳엔 크게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나바와 사울을 포함해 5명이 있었다. 초기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양육했던 것을 생각해봤을 때, 이들 두 명에서 리더자 급 다섯 명으로 늘어나 있다는 것은 분명 공동체적으로 유익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공동체가 금식으로 기도하던 중, 감동을 주셔서 바나바와 사울, 그러니까 초기 리더들을 따로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울의 회심사건을 살펴보면 아마 이방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려고 하셨던 것으로 볼 수 있다(실제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그렇다). 이에 교회는 이 둘을 파송함에 있어 금식과 기도로 은혜를 구하고, 안수함으로 파송하게 된다.

 

본문의 내용은 아주 단순하면서, 우리가 교훈 삼을 수 있는 것 또한 명료하다. 본문에서 언급된 안디옥 교회 공동체의 직분자는 크게 2부류, 인원은 5명이었다. 이제 막 부흥의 단계에 있던 안디옥 교회에서 따로 세움을 입게 된 (교회 개척자)2명의 이탈은 교회적으로 마냥 달갑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공동체적인 입장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아무리 교회 내에서 아쉬움이 있고, 뭔가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겠으나 교회의 주인은 분명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말씀하신다면 그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아니겠는가? 교회의 귄위인가, 성경의 권위인가 말이다.

같은 선지자라 할지라도, 같은 교사의 직분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 맞는 사명과 역할을 부여하신다. 이는 오늘날 모든 교회공동체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교회 내 재직을 살펴보면 아마 교파마다 다양할 것이다. 보통 평신도들은 성도, 집사, 안수집사, 권사, 장로로 세움을 받는데 이들은 직분에 따라 교회 내에서 맡게 되는 섬김의 자리도 어느 정도 다름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오늘의 본문에서와 같이, 같은 직분이라 할지라도 각 개인의 삶의 자리가 다르기에 세상 가운데 맡겨진 각자의 사명 또한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각사람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다르다는 것이다. 교역자는 교역자로써 말씀 전하는 사명, 변호사는 억울하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들을 도와줘야 하는 사명, 의사는 아픈 자들을 살리는 사명, 미화원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는 사명, 학생은 학업을 통해 혹은 전공을 살려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명 등. 이처럼 각자에게 허락하신 사명이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사명은 무엇인가? 현재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가? 아니면 바쁜 일상에 치여 사명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에서 잊혀진지 오래되어 매일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힘들고 어려운 이 세대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나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사명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와 사명을 잊고 살아가는 자의 차이점을. 하루하루 전전긍긍할지라도 사명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와 잊고 살아가는 자의 삶의 차이점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 세상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 다르듯, 그들의 사명 또한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만큼은 분명하게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을 위해서이다. 어떤 삶의 현장에서,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우리가 속한 세상의 공동체에서 복음을 전하거나, 간접적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삶의 예배자로써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고전 10:31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에 비춰볼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생계유지? 성취하고자하는 욕망? ? 명예? 장로교에서 공인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문답 1문답은 이렇다. “Q. 인간은 최고의 목적은 무엇인가?”, “A.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의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목적, 그것도 최고의 목적은 바로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그 삶을 먼저,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분이 있지 않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한 마디로 왕 세자가 저자거리의 지극히 일반적인 백성으로서 변신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인간들에 의해 갖은 고문과 멸시를 받았을 뿐 아니라,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다. 왕세자가 저잣거리의 백성들에게 멸시받고 죽었다는 글을 역사책에서 본 적이 있는가? 인간의 신분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일어났다. 그것도 우리들을 위해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그마저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이 기도 어디에서 자신이 행하는 목적을 자신에게 두었는가? 물론 앞부분에서 그런 뉘앙스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더 공감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셨을 뿐, 그분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다.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말씀 앞에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말씀을 정리하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 각자에게 합당한 삶의 자리를 허락하셨고, 사람마다 다른 그 자리에서 사명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비록 누군가는 CEO의 자리에 있을테고, 그 누군가는 저 밑의 하수도 안에서 냄새를 맡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에 합당한 하나님의 뜻하심이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인간의 관점으로 봤을 때, 귀천이 있어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봤을 때, 동일한 인간에 각기 다른 임무를 부여하셨을 뿐이다. 더 이상 자신의 모습에 한탄하거나 교만해하지 말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을 되돌아보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의 최고의 목적은 나에게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Soli Deo Gl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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