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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 22-35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15장 22-35절

텔레울로스 2018. 4. 11. 16:44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26.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30.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4. (없음)

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에 이어 성령으로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자, 복음의 행진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사도행전에서 보여 지는 귀한 모습 중 하나는, 하나님의 공동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다. 앞서 초대교회에 보여 지는 교회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들을 몇 가지 나누었는데, 오늘의 본문 또한 비슷한 맥락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저번 이야기해서 우리가 나눈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세워감에 있어 지식적이면서 문자적인 말씀을 넘어, 삶 가운데 경험하고 성경을 통한 확인이었다. 여기에서 생각해보자.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세워가는 것들은 어디에서 이루어진 것인가? 바로 교회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또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의한 것임이 회의가운데 확증되자 예수살렘교회에서는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교회 사람들 중에서 택해, 바사바라하는 유다와 실라를 안디옥 교회에 파송하기로 결의한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편지를 작성하는데 그 내용인 즉, 예루살렘 교회의 이름으로 파송되었다는 신원미상의 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이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을 증명하는 차원에서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아래에서 제시된 특별히 주의해야 할 4가지(우상의 제물, , 목매어 죽인 것, 음행)를 제외하고는 율법에 얽매여 혼란스러워말고 평안함을 얻으라는 것이었다. 이 편지가 안디옥 교인들에게 당도하니, 교인들은 그 편지에서 위로하는 말을 통해 기쁨을 얻고, 함께 파송된 선지자 유다와 실라를 통해 권면받아 믿음 위에 굳게 설 수 있었다. 또한 안디옥 교회를 세우고 계속해서 함께 해주는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말씀을 가르침 받을 수 있었다.

 

본문에서 보여 지는 교회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은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말씀을 바로 세우는 공동체, 성도들을 위로, 권면하여 굳게 서게 하는 공동체, 가르치며 전파하는 공동체.

앞서 2가지 주제를 놓고 모이게 된 예루살렘 회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확고히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사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그리고 제자훈련으로 많이들 가르치는 교리라는 것이 이러한 배경 가운데 태동된 것이다. 교리라는 신앙의 체계를 통해 성도들이 결코 흔들리지 못하게 하려했던 것이다.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뜻을 확고히 세우는 공동체. 그곳이 바로 교회의 참된 모습이다. 오늘 날 교회를 보면 성도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보편적인 말씀 안에서 머물기 보다는 각자가 원하는 대로, 각자가 추구하고 싶어 하는 말씀 안에서만 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 누가 말했던가? ‘내가복음을 붙들고 살아간다고(17:6).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나님의 뜻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확실하게 깨닫게 해야 할 책임 또한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점점 말씀이 희귀해져가는(삼상 3:1) 세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확고히 세우는 공동체야 말로 가장 성경적인, 이상적인 교회 공동체일 것이다.
두 번째, 성도들을 위로 또는 권면하여 믿음 위에 굳게 세우는 공동체이다. 이단들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는 안디옥 교회를 위해 예루살렘에서는 편지와 함께 두 선지자 유다와 실라를 파송한다. 직접 전해진 그 편지는 혼란스러웠던 성도들로 하여금 위로를 가져다주었다(31). 뿐만 아니라 유다와 실라는 믿음의 형제들로 하여금 반석위에 굳게 설 수 있도록 권면(위로)한다. 이 세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위로를 필요로 한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만 할 뿐 그 어디에서도 사랑과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듣기 어려운 세대가 이 세대인 듯하다. 심지어 교회의 충성스런 일꾼이라 여겨지는 성도들조차 평일에 직장(학교)에서, 주말에 교회에서 섬기는 것에 의문을 가질 정도이니 말이다. 이럴 때 교회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합당한 보상? 형식적인 위로? 아마 그들은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해 섬김의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진실하며 따뜻한 말 한 마디가 필요하다. 이 세대가 각박해진 것은 각자의 삶이 바빠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조차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시간에 자신이 무엇을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살아가는 풍조가 이 시대에 만연하다. 그렇기에 사람들과의 관계는 형식적이며 기계적으로 쌓여져 있을 뿐 그 가운데 진실된 모습들이 결여된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당장 자기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이러한 관계와 풍조 속에서 우리는 교회의 구성원으로써, 하나님의 공동체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진실한 마음, 그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본문에서 드러난 예루살렘 교회의 편지조차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하루속히 혼란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 가운데 보내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바울과 바나바가 있음에도 유다와 실라를 보낸 이유는 그들에게 교회공동체의 하나 됨 더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들이 우리 교회 공동체에 필요한 모습일 것이다.

세 번째, 아름다운 교회공동체의 모습은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는 공동체이다. 35절에 나타난 바울과 바나바의 모습을 보자. 어찌보면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 당연한 것이다. 안디옥 교회를 세우고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바로 가르쳤으며, 이단이 교회 내에 들어왔을 때도 바른 말씀 위에 세우려했던 그들의 모습은 아주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교회가 아닌, 성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바쁘다는 이유로, 굳이 뭘 해야 하겠냐는 이유로 교회에서 진행되어 지는 귀한 말씀 프로그램이나 양육프로그램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많은 성도들의 현재 모습이다. 그들은 말씀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기회들을 발로 걷어차 버린다. 이러한 모습은 결코 바른 공동체를 형성함에 있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정말 바쁜 일정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피치 못할 이유로 인해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이러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몇이나 될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교회공동체라는 것이 단순히 목회자만, 그러니까 교회의 지도자들만 하나님 앞에서 바로서서 될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 즉, 교인들이 함께 하나를 이루어가야 가장 바람직한 공동체라는 것이다. 물론 교회를 이끌어가는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어떻게 더 바른 말씀을 전할 것인지, 어떻게 해서 더 성경적인 삶을 살 수 있게 이끌 수 있는지 매 순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책임이 있다면, 성도들은 교회에서 진행하는 여러 유익한 프로그램이나 성경을 알 수 있는 시간들에 적극 참여하여 말씀을 가르침 받고 더 깊이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들어가야 할 책임이 또한 존재한다.

 

본문에서 드러난 위 3가지 교회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이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아는 것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실천하는 것으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경계선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이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교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나조차도 항상 이 시점에서 멈춰있음을 보게 된다. 하지만 언제고 멈춰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목회자는 목회자로써의 책임감을 가지고, 성도들은 성도로써의 책임감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 발을 내딛는 그 순간, 교회공동체는 더 천상의 공동체의 모습과 흡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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