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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 36-41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15장 36-41절

텔레울로스 2018. 4. 12. 17:00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이단을 쳐내면서 열심히 교회를 세워가는 바울과 바나바. 교회의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바울은 바나바에게 다가가 2차 선교여행을 제안한다. 1차 선교여행은 이곳저곳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면 2차 선교여행은 갔던 곳을 돌아보며 목양, 양육적 관점에서 다녀오자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다음이야기였다. 이미 경험을 통해 두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게 되자, 바울과 바나바는 다른 팀원을 구해 함께 가자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바나바는 자신의 생질인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마가는 안 된다고 극구 반대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1차 전도여행 중에 한 번 중도에 포기했었기 때문이다(13:13). 이에 바울은 그가 또다시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기에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름을 볼 수 있다. 바나바는 자신의 생질이라는 이유보다, 본래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그 누군가 부족하더라도 끝까지 격려하고 세워주어 훈련시킴으로 함께 나아가고자 했다면, 바울은 사람보다 무언가를 하려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충분히 준비된 사람을 데리고 함께 나아가고자 한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의 의견대립이 얼마나 심했는지, 39절은 심히 다투어 결국 갈라섰다고 밝힌다. 도대체 한 사람을 데리고 가고, 말고가 무엇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1차 전도여행부터 이단배척에까지 함께 했던 두 동료가 이렇게 척을 지게 되는 지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으나, 이 두 사람도 결국 연약한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비록 두 사람의 갈등과 분열이 일어 앞으로의 사역이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이 두 사람을 움직이는 분이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바나바는 마가와 새로운 짝을 이루고,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 받아 온 실라와 짝을 이루어 새로운 선교를 떠난다.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이 갈라졌음에도 새로운 짝을 아주 적절하게 배치해주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지속적으로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다. 16:37을 보면 전도하던 중 옥에 갇힌 바울은 그곳에 있던 간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가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않고 옥에 가두었느냐?”, 이 말에 그의 상관은 두 사람이 로마 사람이라는 말에 두려워하는 것을 38절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이 말한 우리란 단순히 자신 혼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갔던 실라 또한 포함됨을 뜻한다. 즉 바울과 새로운 짝을 이룬 실라 또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방 선교를 위해 바울과 같이 로마 시민권이 있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실라를 짝지어주신 것이다. 이 얼마나 소름 돋는 조합인가? 이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모습은 마가에게서도 볼 수 있다. 4:10에 바울은 자신과 함께 갇혀 있는 마가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그 마가를 두고 골로새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자신의 유언과도 같은 딤후 4:11에서 바울은 마가를 두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었던, 그러니까 필요했던 동역자임을 밝힌다. 이 어찌된 일인가? 비록 바나바의 생질인 마가1차 전도여행에서는 중도 하차를 하는 끈기 없는 모습, 아쉬운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였지만 훗날 바나바와 함께 선교여행을 통해 그는 바울 또한 힘을 얻게 만드는 놀라운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다. 사람을 귀히 여기는 바나바와의 선교여행 속에서 그는 인내하고 가르치고 섬김으로 말미암아 마가를 이렇게까지 세운 것이다. 만약 바울과 함께 다녔다면 과연 마가가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결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본문인 행 15:36-41은 단순히 두 사람의 다툼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비록 다투고 갈라졌지만, 그 안타까움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모습을 보여주셨다. 41절을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살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더 견고하게 세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살아가다보면 종종 부끄러운 나의 모습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들을 보곤 한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 은혜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나 자신을 통해 뜻을 이루시고 계시는 것이다. 나다나엘이 말했듯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 믿을 수 없다는 듯 비꼬는 이 질문은 다름 아닌 우리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결코 우리의 능력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우리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을뿐더러, 그러려는 의지조차 갖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존재를 아시고도 주님께서는 찾아오셔서 우리들을 그의 병사로, 자녀로 삼아주셨다.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로써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 앞에 나아갈 것이 아니라 자녀다운 모습으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실 때 ,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의문을 가져볼 것은 바로 40-41절이다. 바나바와 마가는 팀을 꾸려 배를 타고 구브로로 바로 떠났지만 왜 바울과 실라는 형제들에게 부탁을 받고 떠나 교회들을 견고하게 했다고 기록하는 것인가? 이는 마치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가 바나바와 마가보다도 바울과 실라의 편을 들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바울과 실라가 옳고 바나바와 마가는 틀린 것인가? 실제 바나바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앞으로 사도행전에서 점차 사라지고, 바울은 더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이 질문은 그렇게 답을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두 사람의 관계나 사건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뿐더러, 두 사람은 결국 같은 것을 목적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바울이 바나바보다 더 귀해서, 그가 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자주 기록되었다기보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있겠다. 성경에서 유추하건데 바나바 또한 분명히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일꾼이었다(11:24). 이 가운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결국 41절 후반부이다.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이는 바울에게만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다툼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땅에서는 비록 생각이 다르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자들이 많다. 누군가는 드러나는 자리에서, 그 누군가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그에 합당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에 우리는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믿음의 동역자이자, 하늘가족이기에 동일한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며,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어디에 있든지 우리 모두는 결국 저 천국에서 웃으며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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