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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장 1-5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16장 1-5절

텔레울로스 2018. 4. 18. 18:45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새로운 파트너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떠난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이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게 된다. 특별히 루스드라에는 디모데라는 한 제자가 있었는데, 여러모로 믿음의 형제들에게 인정받던, 칭찬받는 자였다. 바울은 이러한 디모데를 데리고 함께 2차 전도여행을 하려했다. 그러나 바울에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지만 아버지가 헬라인이라는 것이다. 디모데가 머물던 곳에서는 그가 헬라인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유대인들도 잘 알고 있던 것이었다. 이것이 무슨 상관인가?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기에 유대법에 의해 디모데 또한 유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헬라인이었기 때문에 디모데는 필히 할례를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행하지 않은 변절자라는 인식을 갖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갈 2:3-4에서 볼 때,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아 보인다. 할례를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이어 언급되는 갈 5:6, 6:15를 볼 때 상황은 달라진 듯하다. 바울의 신앙관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복음을 사이에 두고 바울 또한 변절한 것인가? 아니다. 앞서 언급된 갈 2:3-4의 같은 경우, 할례의 문제는 구원의 근거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교리적으로 바울은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후반부에 드러난 바울의 의도는 할례가 구원의 근거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로인해 영혼들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선택의 문제로 봐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영혼들을 얻기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한 것이었다. 같은 문제를 두고도 바울에게 있어 중요한 가치관은 따로 있던 것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기특하게 여기신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디모데와 함께 전도여행에 나선 바울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 많은 교회 공동체의 믿음을 굳게 함과 동시에 날마다 그 수가 늘어난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 디모데는 귀한 동역자로 여겨진다. 딤전 1:2은 그 관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집중해야 될 것은 디모데라는 인물보다도 그에게 있어 일어난 일 가운데 드러난 바울의 진의인 것이다. 그가 아들과도 같은 자에게 할례를 시행했던 것은 다름 아닌 대의때문이었다. 바울은 할례를 두고 충분히 자신의 주장을 고집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러기보다는 영혼구원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것이 진리에 있어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지혜롭게 그 우선순위를 붙들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이 세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이 된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른 가치관의 충돌로 인해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우선순위로 여기고 선택에 집중할 것인가? 나의 유익? 다른 사람과의 관계? 대의? ?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각자가 중요시 여기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충분히 다를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 질문을 받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답은 여전히 다르게 내려질 수 있겠지만, 그것을 선택하는 가치관에 있어 사명이 우선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전 8:13은 바울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관을 다시금 드러내고 있다. 당시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부름 받은 바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한 영혼이었을 것이다. 이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기꺼이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의 비유와도 일맥상통한 부분이다(15:4). 그러한 바울에게 있어 흔들리는 고린도교회 성도 한 명이 얼마나 귀했겠는가?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심정을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밝힌다.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에게 있어 우선시되는, 중요한 가치관은 바로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가 예수님처럼은 살아갈 수 없더라도, 바울과 같이 될 수는 없더라도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최소한 발버둥을 쳐야 하지 않겠는가? 불신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개인의 유익과 안위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여 최소한 그 은혜만큼은 살아가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바울은 말한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이 여겨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고전 15:10)” 그는 자신을 칠흑같은 어둠에서 구원해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기에, 적어도 그 은혜만큼은 살아가야하겠다는 결단을 가지고 삶을 살아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다(14:15). 이러한 바울의 또다른 모습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렇게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을 가장 최우선적인 삶의 가치관으로 여기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간절히 바라기는 바울의 위와 같은 고백(고전 15:10)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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