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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장 16-24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16장 16-24절

텔레울로스 2018. 4. 26. 13:44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루스드라에서 루디아와 그의 일가에게 세례를 베푼 바울과 실라는 어느 날 기도하러 가는 중 귀신들린 한 여종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는 바울과 실라를 따라와 큰 소리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외친다. 그런데 이러 행위가 잠시, 한 번 있던 것이 아니라 몇 날 몇 일 지속되는 것이다. 이에 바울과 일행은 괴로워하여 그제야 여종의 몸에서 귀신을 내쫓아버린다. 아마 그녀의 행위는 바울일행이 복음을 전하는 데 크게 방해가 되었던 것 같다. 사실 바울은 그 여인을 처음 봤을 때부터 충분히 영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을 알았을 것이다. 다만 앞서 인내를 가지고 때를 기다렸던 것처럼, 잠시 상황을 지켜보는 와중에 결국 사역의 방해로 인해 귀신을 내쫓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바울이 복음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자, 여종의 주인들은 더 이상 점괘를 통해 수입을 낼 수 없어 바울일행을 붙잡아 관리들에게로 끌고 간다. 아마 그 주변이 영적으로 심히 막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여종의 상관들은 무리들을 충동해 허언으로 바울일행의 죄목들을 키워 고발하자, 그 성의 집정관은 바울일행으로 말미암아 성내가 어지럽혀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들에게 매를 가하며 핍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간수에게 명령해 결국 옥에 가두기까지 한다.

 

본문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린 자를 자유롭게 했다는 명분으로 고발당하고, 핍박받아 옥에 갇히기는 수모를 겪는 바울 일행.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가지 말씀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고전 1:18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사람들에게 복음은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인가?

바울에게 복음은 자신의 삶보다 값진 것이었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을 직접 맛보고 그 누구보다 자신의 가치와 은혜에 대해 깊이 깨달은 자였다(딤전 1:15).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온전히 새것이 되었기 때문이다(고후 5:17). 이에 바울은 자신이 맛본 복음을 이방인들에게도 맛보게 하길 원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여지없이 루디아가 맛본 것이며, 오늘 본문에서 등장한 귀신들린 여인 또한 맛보게 하였다. 그래서 평생 사탄의 권세 아래에 놓여있던, 사람이야 어떻게 되고를 떠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자들의 손에 노라났던 여인 또한 이 복음을 능력으로 맛본 것이었다. 반면 귀신들린 자의 상관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그들이 듣고 본 복음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21)” 한마디로 그들에게 있어 복음은 수익이 되지 않는,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주지 않는 풍속에 불과했던 것이다.
복음이란 바로 이렇다. 그것을 아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능력으로 받아들이고 삶 가운데 경험하지만 멸망하는 자들, 즉 그것을 부인하는 자들에게는 공상 소설보다도 허무맹랑한, 미련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마 7:6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거나 진주를 돼지 앞에 줘도 오히려 그것을 밟고 돌이켜 우릴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마치 갓난아이들에게 백만 원짜리 수표를 줘도 울음하나 그치게 만들 수 없는 무익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에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스스로를 점검해 보기 원한다. 과연 나에게 있어 복음이란 어떤 것인가? 미련한 것인가? 아니면 능력인 것인가? 복음을 들었을 때 당연하게만 여겨질 뿐, 아무런 감흥이 없지는 않은가? 아니면 복음이 전하는 감동으로 인해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8:13).”라는 고백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곤 하는가? 이 세상이 힘들어도 내게 주어진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본 적이 언제냔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세대의 특징을 논하라 한다면 이 단어를 꼽고자 한다. “인문주의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최고 우선적인 가치를 자기 자신에 둔다. 자기가 기분이 좋으면 좋은 일을 행하고, 자기가 하기 싫거나 피곤하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이 세대의 사조이다. 예의범절보다도 우선시 여기는 것이, 가족관계보다 우선시 여겨지는 것이, 심지어 신앙생활보다도 우선시 여기는 것이 바로 자기만족, 자기 우선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우선이라는, 특별히 자기가 최우선이라는 사상 가운데 파생된 이 시대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사조가 교회 안에도 벌써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아니, 심지어 이미 교역자들 세계가운데에서도 만연해 있다. 그러다보니 교회 내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 또한 교인들의 눈치를 보며 듣기 싫어하는 교리는 선포하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선포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자주 본다. 위 말씀에 비춰본다면 과연 그들은 복음을 능력으로 보고 있는 자들인가? 진정 목회자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번엔 성도의 입장에서 논해보자. 사실 그 누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면 기분 좋게 받아들이겠는가? 하지만 이것이 복음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안 된다고, 심지어 중생한 사람조차 항상 자신이 죄인임을 인지하고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선포하면 사람들은 거부감을 일으키며 듣기 싫어한다. 이것이 이 시대 사람들, 아니 교회 좀 다닌다는 성도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에 나는 다시 한 번 이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돌아볼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과연 나는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 마음이 조금 불편해도, 내 양심을 찌르는 것 같아도,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변화시키고 나의 죄를 깨닫게 하며 더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능력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내 기분 나쁘게 하며, 아무런 힘이 되는 말도 안 해주는, 세상의 강의보다도 무익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말씀을 받을 때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자신이 구원받은 자인지 아니면 아직 멸망 받을 자의 자리에 서 있는지 돌아보기를 진심으로 소망해본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4:12)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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