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eoulos

사도행전 17장 16-23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17장 16-23절

텔레울로스 2018. 5. 10. 18:16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데살로니가에서 훼방하던 유대인들은 베뢰아까지 찾아와 바울의 사역을 방해한다. 이에 바울은 베뢰아에 있던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아덴으로 넘어오게 된다. 먼저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며 성 안을 돌아보는데, 그 안에 너무나도 다양한 우상들이 있었기에 격분한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그의 마음에 격분이 솟아오른 것인가? 그는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장터에서는 상인들과 날마다 변론을 벌였다. 심지어 철학자들과도 쟁론을 벌이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이런 바울의 모습을 본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고작 말 많은 사람, 혹은 이방 종교를 전하는 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린다. 그의 전도가 당시 금새 영향이 커졌는지, 그는 아레오바고 법정에 서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평의회에서 자신이 전했던 복음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전했다. 이런 아덴을 돌아보며 바울은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것이 바로 22절이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써 성찰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아덴 성을 돌아보며 격분했던 바울은 이곳저곳에서 복음을 가지고 변론을 벌인다. 그리고 나서 그가 내린 결론은 방금 살펴보았던 22절 말씀이다. 아덴 성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유대교를 붙들었으며 그 누군가는 상업과 관련한, 혹은 농사와 관련한 이방 잡신들을 섬겼으며, 또 누군가는 철학을 통해 무신론을 신봉했던 것 같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각자가 신봉하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는지 새로운 것에 대한 궁금증 이외에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그가 아덴 성을 돌아보며 결론을 내린 23절이다. 자세히 보니 어떤 사람은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써 놓은 단을 두고 제사를 드리고 있던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당시 아덴 성에 있던 사람들은 혹여 자신이 어떠한 신을 섬기지 않을 시 그 신에게 불이익이나 저주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 신, 저 신 다 가져다놓고 제사를 치르곤 했던 것이다. 이에 혹여 자신이 빼놓은 신이 있을까 싶어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단을 놓고 총괄적인 제사를 드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 종교란 실체가 분명한 그 무언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가질 수밖에 없는 허례허식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아덴 성의 이러한 모습을 두고 단지 종교심이 많다고 결론을 내릴 뿐이었다. 한 번 생각해보자. 그들에게 있어 종교심이란 단지 저주를 받지 않기 위한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한 마디로 무언가를 얻기 위한 자신의 노력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려 한다. 과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아덴 성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혹시 우리 또한 하나님이란 신 앞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 혹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을 얻기 위해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독교 역사를 통해 살펴본 진정한 신앙생활의 모습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보다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가 너무나도 벅차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삶의 모습이었다. 스데반이 값을 따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순교할 수 있던 것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해서, 딜을 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해주신 그 은혜가 너무나도 어마어마해서, 그 감격을 자신만 누릴 뿐 아니라 그 앞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이 누려야 하기 때문에 나온 자연스러운 반응이란 말이다. 짐 엘리엇 선교사님이 어린 나이에 인디언 마을에 선교를 하러 갔을 때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던 총을 쏘지 않은 것은 종교심에 따른 행위에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진정한 신앙을 가진 자로써 할 수밖에 없는 행위였다. 이에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우리가 가고 있는 것이 목적의식에서 나온 종교심인 것인가? 아니면 은혜에서 나오는 신앙인 것인가?

 

더 나아가 우리는 바울의 모습에서 또 다른, 진정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마음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허례허식과 두려움을 쫓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아덴 성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격분했다. 누가가 기록한 바울의 이 격분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하나의 현상이나 상황 속에서 드러난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성내에 있으면서 느꼈던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하나님을 진정 알지 못한 채 기껏해야 종교생활을 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거룩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신을 섬기는 그들을 보며 여러분, 그것이 아닙니다!’라고 마음 가운데 외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움에 드러난 분노가 얼마나 컸으면 그는 가는 곳곳 마다, 본문에서 나타나는바 회당이나 장터, 철학자들과 지속적으로 논쟁을 했겠는가! 특별히 누가는 바울이 회당과 장터에서 했던 것을 변론이라 했으며, 철학자들과 했던 것은 쟁론이라고 기록했다. 변론이란 단순히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라면 쟁론이란 다투어 토론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상대에 따라서, 조목조목 자신이 가지고 있던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하나하나 논박하며 복음에 대해 설명했던 것이다. 과연 우리의 마음에 바울과 같은 거룩한 분노가 있는 것인가? 하나님을 손가락질하며 욕하는 주변의 사람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따지는 가족들, 하나님을 믿으면 밥을 주냐 쌀을 주냐 비꼬는 친구들. 이들을 볼 때 과연 우리의 마음 가운데 어떠한 감정이 드는 것인가? 마냥 그들에게 화가 나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긍휼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가? 이런 상황 가운데 우리가 우선적으로 가져야 할 마음은 다름 아닌 거룩한 분노여야 한다. 이 분노 가운데 복음에 대한 열정이 솟고, 그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이 파생되고, 선교에 대한 도전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시작점은 우리의 일방적인 감정도 아니요. 사람들에 대한 불쌍함도 아닌, 복음의 가치가 되어야만 한다.

 

이에 우리는 다시 한 번 2가지 귀한 사실을 기억하자. 과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종교심인가? 아니면 진정한 신앙인가? 덧붙여 우리에게 거룩한 분노가 있는 것인가? 일상의 삶 가운데 안주하지 말고 날마다 깨어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은혜 받은 자로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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