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eoulos
사도행전 17장 32-34절 본문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아덴으로 피신하게 된 바울은 그의 동역자들을 기다리며 도시를 탐색한다. 그곳에서 각종 우상이 즐비한 모습을 본 바울은 격분한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며 복음을 전한다. 어디서나 그랬듯이, 바울은 고발당해 아레오바고 의회에 서게 된다. 아마 바울에게 있어 이곳에 서게 된 것은 오히려 기회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심으로 가득한 아덴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연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가득할 그 곳에서 담대하게 자신이 들고 있는 복음을 전한 바울, 본문은 그 자리에서 복음을 들은 아덴사람들의 반응에서 시작된다. 비록 세 구절의 짧은 이야기이지만, 이 안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2가지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어디든지 우리를 보내시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바울이 아덴까지 간 것은 본 계획에 있었다기보다는 아마 피신으로 보인다(17:14). 그렇게 17:16부터 시작된 아덴에서의 전도여행은 오늘 본문에서 마무리되고 18:1부터 고린도로 넘어가게 된다. 17장을 통시적으로 바라보자. 분량 상 성경은 앞서 데살로니가나 베뢰아보다도 아덴에서의 전도여행에 더 많은 부분 할애하고 있다. 그만큼 무엇인가 더 다이나믹하며 많은 일들이 있지 않을까 충분히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차이점을 두고 볼 때, 데살로니가나 베뢰아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바울의 설교의 내용이 아덴에서는 기록되고 있다. 어쩌면 저자 누가는 아덴에서의 바울의 수고를 더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수고에 비해, 그리고 분량에 비해 아덴에서의 열매는 적게 거둔 듯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아덴 사람들의 반응이 잡힌다. 그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2가지 였다. ①조롱하거나, ②다시 한 번 바울의 말을 듣기를 원했다. 그리고 결론은 34절, 몇 사람이 가까이 믿으니 그 중에서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 또 다른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뒤에 또 누군가 회심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성경에 기록된 것만을 두고 봤을 때 정말 소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데살로니가나 베뢰아 같은 경우 누가는 큰 무리, 적지 아니한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아덴 같은 경우 정말 소수의 사람들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비록 적은 수이지만 그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바울을 그곳에 보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계획에 없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피신’이라는 큰 틀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려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그의 자녀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 자녀들을 통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며, 그 복음을 통해 그의 또 다른 선택된 자녀들을 부르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자녀 된 우리들은 언제고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론가 부르신다면 그곳에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가고 싶은데 어쩌다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다. 만약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했는데 독일로 가게 되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다. 만약 내 꿈이 선생님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회사원이 되어 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란 말이다. 그러니 기억하자. 비록 당장 내가 그곳에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없을지라도, 지금 서 있는 현실이라는 그림 안에서 못 마땅하더라도 결국 모든 그림은 하나님께서 그리셨다는 것을.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보내셨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힘든 현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마음가짐을 청산하고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큰 섭리를 기대하며 살아가야 한다. (반대로 잠깐 놀러온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내 친구로 말미암아 나의 부모님이 하나님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우리는 항상 준비된 자로써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34절에 언급된, 예수님을 믿기로 한 사람은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바울을 아덴으로 보내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구이기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보내신 것인가? 여기에서 언급된 ‘또 다른 누군가’는 알지 못하더라도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고 이름이 거론된 사람들을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살펴볼 수 있다. ‘디오누시오’는 이 당시 바울이 붙잡혀가 연설을 했던 의회의 관리였는데, 예수를 믿고 훗날 각종 이방 신들이 가득한 이 아덴 지역의 초대 감독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늘 날 우리의 상황과 접목했을 때 아덴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의 담임목사쯤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귀한 부르심이란 말인가? ‘다마리’라는 불리우는 여인의 경우 2가지 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내가 따르는 견해를 제시하려 한다. 당시 아레오바고 의회는 산헤드린 공의회와는 다르게 회원의 자격이 되는 사람들만 참여해 듣고 볼 수 있는 형식이 아니었다. 아레오바고 의회에도 역시 회원들이 있었으나, 열린 공간에서 자유롭게 열리다보니 의회가 열린 곳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그 의회에서 하는 말들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다마리라는 여인이 마침 바울이 그곳에서 복음을 연설하고 있었을 때, 지나가다가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었다. 비록 이 여인 같은 경우, 앞서 언급된 디오누시오와 같이 훗날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여인이 되지는 않더라도 그 방식에 있어 또 얼마나 귀한 부르심이란 말인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별 볼일 없는 이 여인의 이름을 특별히 기록한 것은 이러한 부르심을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처럼 바울의 연설은 귀한 부르심들을 자아냈다. 하나님께서는 붙잡히다시피 의회로 간 바울의 연설을 통해 그곳에 있던 관리 뿐 아니라 지나가던 여인을 주님께로 인도하셨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복음을 가진 자로서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하실 줄 알고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말 한마디를 통해 그 누군가가 주님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작은 선행이 그 누군가를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지도 않은 언행들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사에, 항상 깨어서 우리 스스로의 영혼을 지키며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본문을 정리하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2가지 원리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깨어서 하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부르신 이유를 여쭈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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