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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32-34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17장 32-34절

텔레울로스 2018. 5. 18. 17:56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아덴으로 피신하게 된 바울은 그의 동역자들을 기다리며 도시를 탐색한다. 그곳에서 각종 우상이 즐비한 모습을 본 바울은 격분한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며 복음을 전한다. 어디서나 그랬듯이, 바울은 고발당해 아레오바고 의회에 서게 된다. 아마 바울에게 있어 이곳에 서게 된 것은 오히려 기회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심으로 가득한 아덴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연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가득할 그 곳에서 담대하게 자신이 들고 있는 복음을 전한 바울, 본문은 그 자리에서 복음을 들은 아덴사람들의 반응에서 시작된다. 비록 세 구절의 짧은 이야기이지만, 이 안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2가지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어디든지 우리를 보내시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바울이 아덴까지 간 것은 본 계획에 있었다기보다는 아마 피신으로 보인다(17:14). 그렇게 17:16부터 시작된 아덴에서의 전도여행은 오늘 본문에서 마무리되고 18:1부터 고린도로 넘어가게 된다. 17장을 통시적으로 바라보자. 분량 상 성경은 앞서 데살로니가나 베뢰아보다도 아덴에서의 전도여행에 더 많은 부분 할애하고 있다. 그만큼 무엇인가 더 다이나믹하며 많은 일들이 있지 않을까 충분히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차이점을 두고 볼 때, 데살로니가나 베뢰아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바울의 설교의 내용이 아덴에서는 기록되고 있다. 어쩌면 저자 누가는 아덴에서의 바울의 수고를 더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수고에 비해, 그리고 분량에 비해 아덴에서의 열매는 적게 거둔 듯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아덴 사람들의 반응이 잡힌다. 그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2가지 였다. 조롱하거나, 다시 한 번 바울의 말을 듣기를 원했다. 그리고 결론은 34, 몇 사람이 가까이 믿으니 그 중에서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 또 다른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뒤에 또 누군가 회심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성경에 기록된 것만을 두고 봤을 때 정말 소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데살로니가나 베뢰아 같은 경우 누가는 큰 무리, 적지 아니한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아덴 같은 경우 정말 소수의 사람들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비록 적은 수이지만 그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바울을 그곳에 보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계획에 없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피신이라는 큰 틀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려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그의 자녀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 자녀들을 통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며, 그 복음을 통해 그의 또 다른 선택된 자녀들을 부르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자녀 된 우리들은 언제고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론가 부르신다면 그곳에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가고 싶은데 어쩌다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다. 만약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했는데 독일로 가게 되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다. 만약 내 꿈이 선생님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회사원이 되어 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란 말이다. 그러니 기억하자. 비록 당장 내가 그곳에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없을지라도, 지금 서 있는 현실이라는 그림 안에서 못 마땅하더라도 결국 모든 그림은 하나님께서 그리셨다는 것을.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보내셨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힘든 현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마음가짐을 청산하고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큰 섭리를 기대하며 살아가야 한다. (반대로 잠깐 놀러온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내 친구로 말미암아 나의 부모님이 하나님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우리는 항상 준비된 자로써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34절에 언급된, 예수님을 믿기로 한 사람은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바울을 아덴으로 보내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구이기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보내신 것인가? 여기에서 언급된 또 다른 누군가는 알지 못하더라도 디오누시오다마리라고 이름이 거론된 사람들을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살펴볼 수 있다. ‘디오누시오는 이 당시 바울이 붙잡혀가 연설을 했던 의회의 관리였는데, 예수를 믿고 훗날 각종 이방 신들이 가득한 이 아덴 지역의 초대 감독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늘 날 우리의 상황과 접목했을 때 아덴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의 담임목사쯤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귀한 부르심이란 말인가? ‘다마리라는 불리우는 여인의 경우 2가지 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내가 따르는 견해를 제시하려 한다. 당시 아레오바고 의회는 산헤드린 공의회와는 다르게 회원의 자격이 되는 사람들만 참여해 듣고 볼 수 있는 형식이 아니었다. 아레오바고 의회에도 역시 회원들이 있었으나, 열린 공간에서 자유롭게 열리다보니 의회가 열린 곳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그 의회에서 하는 말들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다마리라는 여인이 마침 바울이 그곳에서 복음을 연설하고 있었을 때, 지나가다가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었다. 비록 이 여인 같은 경우, 앞서 언급된 디오누시오와 같이 훗날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여인이 되지는 않더라도 그 방식에 있어 또 얼마나 귀한 부르심이란 말인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별 볼일 없는 이 여인의 이름을 특별히 기록한 것은 이러한 부르심을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처럼 바울의 연설은 귀한 부르심들을 자아냈다. 하나님께서는 붙잡히다시피 의회로 간 바울의 연설을 통해 그곳에 있던 관리 뿐 아니라 지나가던 여인을 주님께로 인도하셨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복음을 가진 자로서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하실 줄 알고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말 한마디를 통해 그 누군가가 주님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작은 선행이 그 누군가를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지도 않은 언행들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사에, 항상 깨어서 우리 스스로의 영혼을 지키며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본문을 정리하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2가지 원리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깨어서 하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부르신 이유를 여쭈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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