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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장 1-6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20장 1-6절

텔레울로스 2018. 7. 6. 20:11

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정말 중요한 순간에, 혹은 기대했던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다. 이때 내가 계획하거나 원했던 대로 흘러가게 되면 감사와 기쁨이 차고 넘치겠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남는 것은 낙담과 좌절뿐이다. 이러한 반응은 불신자나 그리스도인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쓰나미가 찾아왔을 때 불신자는 세상에 손가락질을 하며 하늘을 원망한다면, 그리스도인 또한 나에게 왜 이러한 일들이 주어진 것인지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다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마저 결코 성경적이지 않은 사고 가운데 애써 상황을 정리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이란(특별히 징계가 아닌 이상) 오늘 본문에서 드러난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허락된 것이다. 오늘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 관찰: 본문 요약
소동을 겪은 이후,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게 되나 마게도냐로 향했다(1). 그는 마게도냐 지방에서 헬라로 넘어가는 곳곳을 들려 전에 세웠던 교인들을 격려하며 교회를 굳건하게 했다(2). 헬라지방에서 그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고린도 지방에 머무르는데, 이때 행 18장에서 언급된 디도 유스도(다른 이름으로 가이사라 불린다)의 집에서 석 달간 머물렀던 것 같다. 이후 그는 마게도냐 - 헬라지방을 다니며 걷게 된 구제금을 들고 얼마 안남은 유월절 시기에 맞춰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가려 했다. 그렇게 배에 오른 바울은 때마침 그의 대적들이었던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공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바울은 누가를 제외한 자신의 모든 동역자들을 먼저 드로아로 보내고, 자신은 누가와 함께 해로가 아닌 육로를 통해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간다.

#2. 해석: 본문 연구
에베소에서의 소동이 성에 안찼는지, 사탄은 마게도냐에서 헬라지방까지 세계를 활보하며 교회를 굳건하게 하는 바울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던 것 같다. 갈리오 총독에 의해 쫓겨난 유대교 대적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떠나려 했던 바울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두고만 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의 계략이 치밀하더라도 감히 하나님의 허락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한계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대적자들의 공모를 미리 알게 해주셨을 뿐 아니라, 이후 피할 길 까지 열어주신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여기,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다.

이렇듯 아직 바울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에 하나님께서는 대적자들의 계략에 바울이 당하게 두시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바울을 헬라지방에서 피신시키시고 마게도냐 지방을 거쳐 드로아로 가게 하신 것인가? 왕하 19장에서 하루아침에 송장이 된 앗수르의 군대처럼 대적들을 심판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 행해진 일이기에, 그 누구도 성경의 기록에 대해 토를 달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바울을 그렇게 인도하신 이유를 두고 역사적 기록을 찾아가보면, 이 또한 하나님의 큰 그림 가운데 필요했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많은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마게도냐 지방으로 돌아가 빌립보에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보냈는데, 빌립보는 이방 지역이었기에 바울과 누가는 유대교적인 방식으로 절기를 지키진 못했지만 그들은 아쉬운 대로 그곳에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보내며 함께 그리스도를 전했고 교인들을 굳건하게 했다. 하나님은 그의 타이틀에 맞게 다시 한 번 그가 필요한 곳에 그를 인도하려 했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당시 바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각 지방을 돌며 수거한 구제헌금을 들고 이제 곧 얼마 남지 않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상황 상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렇지, 바울의 입장에서는 결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이나 역사적 기록 그 어디를 살펴봐도 바울은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그는 생명의 위협이 되는 상황이 닥친 만큼 강력한 하나님의 개입이 있음을 인식하고 빌립보에서조차 유월절을 보내며 전도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성경책에는 없지만 베쟈 사본에는 그가 돌아가기로 결단했던 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기록이 써있다고 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것이 사실인지 바울만 알겠지만 분명한 건 그는 그 상황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3. 적용 및 결단
이처럼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이 모든 상황들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지식적으로는,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당장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 너무나도 높기 때문에, 현실의 벽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넘어지며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상황들에 흔들릴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하실 것인지를 차분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상황에 따른 체감적 강도가 쌔면 쌜수록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으셨던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더 드러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롬 8:38-39은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다.”고 말이다. 당장 내일 세상이 사라진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한 번 선택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녀는 결코 버려두시지 않는다. 세상 끝 날까지 지키시고 또 지키시기 때문이다. 주인 없이 세상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새조차도 하나님께서 친히 일일이 먹이시는데, 하물며 그의 자녀들을 지키시고 먹이시지 않겠는가(6:26)? 그러니 조금만 우리의 시선을 하늘 위로 높이자. 당장 눈앞에 닥쳐온 현실을 어찌할 바 모를지라도 그 현실마저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고 인도하고 계시는 중이기 때문이다.

간절히 바라기는 적어도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만큼은 이 원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길 소망한다. 그로 인해 이 땅의 지쳐 넘어진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써 다시 일어나는 모범을 제시함으로, 그들도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로 인하여 일어나는 모습이 가득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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