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eoulos
사도행전 20장 13-16절 본문
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1. 관찰: 본문 요약
드로아에서 동료들과 함께 사역을 펼쳐나갔던 바울은 이후 앗소로 이동한다. 역에서 그는 동료들이 배를 타고 갈 때, 혼자 육로로 걸어서 가고자 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약 38km나 된다는 점에서 결코 적지 않은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혼자 걸어갔는데, 많은 학자들은 이에 대해 하나님과의 교제 때문일 거라고 추측한다. 이후 본문은 두 절에 걸쳐(14, 15) 바울이 앗소에서 동료들을 만나 어떻게 이동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16절, 그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에베소를 들르지 않고 급히 가려하는 모습이 보여 진다.
#2. 해석: 본문 연구
네 절에 걸친 오늘의 본문은 바울과 그 일행이 어떻게 이동했는지 설명하는 스케줄 표와 같아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울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13, 16절이다. (많은 학자들의 주장처럼)13절에서 보여 지는 바울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잠시 주위 환경에서 빠져나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했다. 그에 반해 마지막 16절에서는 예루살렘에 이르기 위한 그의 조급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왜 처음과 마지막의 두 구절에서 보여 지는 바울의 심리는 상반되어 나타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에 달려 있었다.
앞서 다루었듯이 드로아-앗소의 길은 걸어가기에는 먼 거리였지만(38km),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시간이자, 앞으로의 사역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이후 내용을 살펴보면 그는 에베소 장로들과 마지막 만남을 가졌으며(20:17-30),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압송되었다(27-28장)는 점에 있어 마지막 사역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모두가 만류하는 가운데, 마지막 사역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성령의 충만함을 구할 뿐 아니라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간구는 단순히 드로아-앗소에서 뿐 아니라, 배를 타고 이동하는 14-15절에서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의 사역에 담대하게 발을 내딛은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마치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에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의 모습과 흡사해 보인다(막 14:41-42). 자신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결코 자신의 뜻과 능력으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충분한 교제 끝에 성령의 충만함과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교제란 당시라는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끊임없이 여쭈어가며 자신의 삶을 그분의 뜻에 맞추는 것이다(막 1:35; 눅 22:39).
#3. 적용 및 결단
예수님과 바울의 모습 앞에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나는 삶 가운데 무엇인가를 해 나감에 있어 얼마나 하나님께 여쭙고 있는 것인가? 혹시 내가 원하는 것은 여쭙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 여쭈었다고는 하나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통보형식은 아니었는가? 단 일회성에 그친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한다고 과연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선악과 사건 이후 인간에게 ‘선한 것’이란 절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죄성으로 인해 인간의 모든 것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이 절대기준이신 하나님께 여쭙지 않고 독단적으로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판단한다? 이는 어린 아이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낭떠러지로 뛰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 소경이 자신의 지성과 감을 믿고 누군가를 옳은 길로 인도하려는 것과 같다. 성경에 의하면 거듭나지 않은 인간은 선한 것을 보지 못하는 소경일 뿐이며, 선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와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서 말한 질문을 통해 자신을 점검해보자. 삶 가운데 하나님께 여쭙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정확히 모르거나 교만이라는 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 기도 한 번 했다고 으쓱대는 것 또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의 늪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 드러난 바울의 모습처럼 매순간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뜻에 삶을 맞추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항상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님처럼 매순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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