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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장 7-12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20장 7-12절

텔레울로스 2018. 7. 12. 13:44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성경을 읽다보면 종종 이 본문은 뭐지?라고 생각할 만한, 전체적인 흐름 가운데 갑자기 중간에 무엇인가 끼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보통 성경을 묵상할 때 오늘 이 본문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라고 시작을 한다면, 처음에 말한 본문들은 이 본문이 왜 여기에 있지?’에서부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오늘의 본문 또한 후자에 속한 부류라고 생각된다.
(전에 나누었듯이)본문의 앞 단락은 유대인들의 공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지켜주셔서 안전하게 그들의 동료가 있는 드로아에 도착했음을 말한다. 이어서 본문이 등장하며, 본문의 뒤 단락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선교일정이 계속해서 그려진다. 표현상 20:6에서 이레를 머물렀다고 말했기에, 본문이 이레 동안 드로아에서 머물렀던 그들의 스토리를 넣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상,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들의 일정에 초점을 맞춘다면 누가가 굳이 오늘의 본문을 기록하지 않았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본문에 등장하는 유두고라 하는 청년은 성경 안에서 본문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점 또한 이런 의문을 뒷받침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누가는 오늘의 본문을 기록한 것인가? 이 스토리를 통해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인가?

 

#1. 관찰: 본문 요약
드로아에서 한 이레, 즉 일주일을 보내고 있는 바울과 그 일행, 7절을 보면 그 주간의 첫날이라 하는 것을 보니 주일이었던 것 같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떡을 떼려 하려 모였다는 표현은 주일에 성찬을 기념하는 과정에서의 교제를 나타냄으로 주일이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덧붙여 바울이 이튿날 떠난다는 것은 드로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임을 말하고 있다. 특별히 바울이 사람들을 앞에 두고 밤중까지 계속해서 강론했다는 것을 볼 때, 아마 드로아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보니 아쉬움과 동시에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더 힘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기록을 참고할 때, 이곳에 현재 모인 자들은 이방인들이었는데 이방인 중에서도 주인의 밑에서 일을 하는 누군가의 노예로 결코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 되어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기에 바울이 있던 곳을 찾아왔다. 8절을 보면 그들이 모여 있던 건물은 복층이었던 것 같다. 이미 어두움이 깔린 곳이었기에 그들은 위쪽에 등불을 켜 바울을 주목해 강론을 들었다. 그들이 켜 놓은 등불에서 그을림과 연기가 생겨 그랬는지, 아니면 낮에 열심히 일하고 늦은 밤 강론에 집중하려니 피곤해서 그랬는지, 당시 노예 중에서도 흔한 이름이었던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터에 걸쳐 앉아 신선한 공기를 쐬며 강론을 들었던 것 같다. 여기까지 그의 행동은 교역자인 내가 봐도 정말 바람직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러티브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다운되기 시작한다. 9절에서와 같이 창터에 걸쳐 앉았음에도 피곤함을 이기지 못했던 그가 3층에서 떨어져 죽게 된 것이다. 이에 바울은 곧장 내려가 사람들에게 소란 피우지 말 것을 권하고 비상조취를 취했다. 생명이 그에게 있다 재미있게도 누가는 분명 9절에서 죽었다고 표현했는데, 바울은 그가 죽지 않았다 혹은 살아났다고 말하지 않고 생명이 있다.’고 말했다. 이후 바울은 올라가 떡을 떼어 먹으며 자신의 하던 것을 밤이 새기까지 계속했다. 저명한 신학자는 바울이 날이 새기까지 자리를 뜨지 않은 것은 유두고의 깨어남을 보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바울의 말대로 청년 유두고는 다시 일어나 그곳에 있던 많은 자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2. 해석: 본문 연구
유두고의 부활을 드러내는 오늘의 본문은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 안에는 복음의 아름다운 원리가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유두고의 죽음을 다루는 7-9절을 전반부로, 살아난 10-12절을 후반부로 볼 때 본문은 문학적으로 아수라백작처럼 상반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전반부(7-9)를 먼저 살펴보자. 배경이 되는 어두컴컴한 밤이란 이 세상을, 그 가운데 등불을 켰다는 것은 어두움을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세상이라는 어두움 속에서 바울과 그 일행이 등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이때 노예 중에서도 가장 흔하디 흔한 이름이었던 유두고가 죽었다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보편적인 죽음을 말한다. 주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에도, 그 말씀을 전하는 빛의 용사들이 있음에도 그 불빛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10절부터 후반부(10-12)가 시작되는 동시에 반전이 일어난다. 유두고의 죽음이 선포된 그 현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생명이 그에게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비록 모든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바울은 성찬을 기념하는 자리로 돌아갔으며 날이 새기까지 그곳에 머물렀다가 유두고의 깨어남을 보고 떠나는데, 이는 성찬을 통해 힘을 얻고 다시 밝아오는 새 날을 맞이하며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가는 전도사로서의 모범을 제시해주고 있다. 동시에 어두컴컴한 밤에서 밝아오는 새 날의 시작은 죄의 왕국에서 떠나 은혜의 왕국에서 새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배경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마지막 12절까지 오게 된다. 새 생명을 얻게 된 그리스도인은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참된 평화를 전하는 영향을 미치는 자이다.

 

이처럼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본문은 크게 3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첫 번째로, 죄에 대해 죽음을 선포 받았으나 새 생명을 소유한 자이다. 9절에서 누가는 분명하게 선포했다. 죽었는지라.”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이 말한다. 생명이 그에게 있다.” 상반된 이들의 말은 롬 6:11의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이 살아 있는 자가 여김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일 때다. 죽음의 세력이 묶여 있던 유두고가 살아난 것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혔던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가 유두고 안에 들어가셨던 것이다. 그를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 것이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신분이 바뀐 자이다. 한글 개역개정 성경을 보면 9, 12절 모두 유두고를 청년이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그런데 원어를 살펴보면 저자 누가는 이 두 구절에서 등장하는 청년이라는 단어를 달리 기록했다. 정확히 말해서 9절에서의 청년은 문자 그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젊은 사람을 뜻하는데 반해 12절에서의 청년은 조금 다르다. 12절에 쓰인 단어는 본문을 제외하고 총 4번 등장하는데 그 중 3번의 뜻이 바로 , 노예의 개념이다. 용례를 참고해 본다면 12절 또한 으로 번역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유두고가 죽기 전과 살아난 후의 신분을 의도적으로 달리 표현한 것이다. 죽기 전 청년 유두고는 세상으로 볼 때 누군가의 종, 노예였다. 그에게는 자유가 없이 낮에는 주인 밑에서 열심히 일을 했고, 밤이 되어서나마 자유를 얻어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죽었다 살아난 청년 유두고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종, 노예가 되었다. 비록 세상이 볼 때 그의 신분은 여전히 동일한 누군가의 종으로 동일했지만, 그의 본성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 있었기에 앞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살아갈 자가 된 것이다. 더 이상 죄의 왕국에 있지 않고 은혜의 왕국에 넘어 옴으로써 그분의 통치를 받게 된 것이다. 유두고의 신분은 분명히 바뀌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올바른 정체성이다.

마지막이자, 세 번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친절하게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이 땅을 살아가야 할지 그 비전까지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위로를 전하는 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위로란 무엇인가? 단순히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인가? 힘들고 어려울 때 토닥토닥 해주는 격려를 뜻하는 것인가? 아니다. 본문에서 나타난 위로란 그리스도인으로써 주님께서 함께 해주심으로 인한 내적 평안을 뜻한다. 이 내적 평안은 삶의 여유와 물질의 풍요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삶은 고달프고 빡빡하더라도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기에 잘 통과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결코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평안으로 어찌되었든지 타인에게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도대체 저 친구는 어떻게 저렇게 평안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알기론 잘 사는 것도 아니고 가진 것도 나보다 더 없어 보이는데...’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말이나 행동뿐만 아니라 삶에서 이런 질문들을 불신자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이 평안의 출처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임을 삶으로 증명해 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비전이자 사명이다.


#3. 적용 및 결단
오늘 우리는 이 본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봐야 한다. 과연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나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비전이 드러나고 있는 것인가?’ 만약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써 타인에게 하나님의 평안을 전달하지 못한다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먼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나에게 새 생명이 있는 가 혹은 신분이 바뀌어 더 이상 죄의 왕국이 아닌 은혜의 왕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자신의 신분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것이다. 17살의 고등학생이 자신을 애플의 CEO로 착각하고 어떻게 애플을 운영할 수 있겠는가? 90살의 할아버지가 아직도 상 남자로 생각하여 건설현장에 가 삽질을 한다고 하면 어떠하겠는가? 갓난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갑자기 쉐프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처럼 자신의 신분을 명확하게 알아야 그에 따른 삶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바쁜 일상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먼저 생각해보자. 과연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이 한 문장이 우리의 삶을 규정해주며, 그리스도인으로써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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