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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장 17-26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21장 17-26절

텔레울로스 2018. 7. 31. 14:06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1. 관찰: 본문 요약
드디어, 천신만고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일행, 그들은 반겨주는 형제들을 뒤로하고 이튿날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한다. 그곳의 대표로 있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문안하고 그동안 선교여행에 있었던 여러 간증들을 나눈다.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곧이어 그들은 바울에게 있어 민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울을 향한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시각이었다. 바울의 이방선교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상당히 불편한 구석이 있었다. 왜냐하면 구원을 두고 바울과 유대인들과의 율법관은 분명 다른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여행 당시 이방 지역에서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잘못된 사상이 도처에 퍼져 있었기에 바울은 그것을 바로 잡아야만 했었다. 그래서 구원과 연관된 진리에 있어서만큼은 아주 명확했으며 냉철했다. 그런데 구원에 반하는 진리에 대해서는 아주 과감하게 비판했다면, 할례나 음식법과 같은 것들은 다소 가치중립적으로 여겼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전했던 이러한 형태의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모세를 배반한 행동이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에 교회공동체는 바울에 대한 강성한 유대인들의 마음을 달래줄 방법을 바울에게 제시했다. 그것인 즉, 나실인 규정으로 인해 머리를 밀지 않은 자들이 공동체 안에 넷이 있는데, 얼마 후 서원기간이 끝나는 때를 맞춰 그들을 데리고 머리를 깎으러 함께 동행 할 것을 권한 것이다. 당시 나실인은 혼자 머리를 깎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동역자 일인과 함께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규례를 지키며 진행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있어 특정한 동역자가 되어 율법을 지키는 모습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들이 조금은 수그러들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다. 이에 바울은 평소와는 다른 태도로 공동체의 권면을 그대로 따른다.

#2. 해석: 본문 연구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바울의 태도이다. 누구보다 진리에 있어서 타협을 보지 않는 그에게 공동체의 권면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선교여행 내내 유대인들의 율법관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해왔던 그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6절과 같이 그 권면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도대체 왜 그렇게 행동한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앞서 예루살렘에 오기 전, 그가 했던 기도와 결단을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20:23-24를 보면 성령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면 큰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바울에게 미리 말씀해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려했던 이유는 단 하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각오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왔더니 교회공동체에서 하는 말은 고작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주라고 하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있어 이 얼마나 허탈한 상황이냔 말인가? 이방 땅에서 그렇게 반대했던 율법관에 따른 행동을 지금 자신보고 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아무 말 없이 교회공동체의 권면을 따랐다. ?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그랬던 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춰준다 한들, 성령님의 말씀처럼 그에게 닥쳐올 환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있어 남은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지금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들이 마냥 내키지 않을지라도 자신이 기꺼이 유대인이 되어 그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고전 9:20).
다만 이 과정 가운데 결코 놓치지 말아야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은 바울이 유대인들의 율법을 따른 것이지만 그에게 있어 분명한 신념이 있었다. 그것은 진리에 있어서는 결코 물러서지 않지만, 그 외의 것은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도행전이 아닌 그의 서신서에서 명확하게 언급되었다. 구원은 율법을 지킴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그 믿음에 의한 것임을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1:16-17). 그러나 할례나 음식에 관한 것들은 앞서 말했듯이 가치중립적으로 여겼다(14:2-6). 심지어 그는 자신의 행위로 누군가 실족하게 될 것을 우려해 고기조차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았겠는가(고전 8:13)? 이것이 바로 복음을 향한 바울의 신념이자 삶 그 자체였다. 바울은 진리에 있어 지켜야할 선이 분명하게 있으면서, 동시에 그 이외의 것은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넉넉함을 가진 자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오늘 바울의 모습은 큰 도전이 된다. 우리들이 지키고 있는 선은 무엇인가? 그리고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넉넉함을 과연 가지고 있는가? 살다보면 여러 상황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곤 한다. 물론 사람마다, 직업마다 그 다름은 존재하겠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누구나 자기 위주로 살아가려 한다. 그러다보니 함께 사는 부부, 가족, 그 이상으로 회사에서까지 의견 차이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견 차이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의견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을 때 결국 분열과 상처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대부분 어느 하나 양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주장만을 끝까지 고집하다보니 발생하게 된다. 여기에서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일상에 너무나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며,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쉽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며 스스로 이렇게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나는 무엇을 이렇게 지키려 하는 것인가?” 바울이 말한바 그것이 진리에 관한 것이라면 끝까지 싸워 지키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것은 상대가 누구라도 결코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양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와 무관한 것이라면, 그로인해 덕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분란만 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가득하다면, 충분히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 또한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 끝까지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배려 없는 자신의 아집일 뿐이며, 자신만이 옳다는 교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스스로를 돌아보자. 그리고 점검해보자. 우리가 지켜내야 할 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진리 앞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마음 중심에 있는 것인지.

예수님 또한 그 선과 넉넉함을 모두 갖추고 우리에게 모범이 되어주셨다.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선은 지극히 진리앞에 있었다. 그분이 하는 모습 삶의 행동들은 앞서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에 부합한 것이었다. 그는 진리에서 결코 벗어난 행동을 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끝에 바로 십자가가 있었다. 그는 예언의 말씀들을 확정하기 위해 그곳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다시금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다. 이 땅에 날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그가 지키고자 했던 선, 지켜낸 선은 오직 진리에 있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앞에 다시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자. 과연 내가 지키고 있는 선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3. 적용 및 결단
본문에서 나타난 바울의 모습은 단순히 우리가 보고 따라해야 할 모범적인 이상에 그치지 않고 우리는 그리스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그가 기꺼이 내어주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나. 2가지 명제 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다시금 고민하며 주님을 바라봐야 한다. 말씀 끝에 주님이 계셔야 그 시선이 올바른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찾지 못하는 명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님을 보지 못하는 성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그분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께로 올바로 나아갈 수 있다. 아무쪼록 오늘의 말씀을 통해 다시금 선을 재정립하고,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들에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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