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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장 1-16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21장 1-16절

텔레울로스 2018. 7. 27. 17:54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1. 관찰: 본문 요약
이제 바울의 3차 전도여행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의 만남을 뒤로 한 채 예루살렘을 향해 다시 떠나기 시작한다. 본문은 밀레도에서 다시 출발해 고스, 로도, 바다라, 두로, 돌레마이, 가이사랴에 이르러 예루살렘 문턱까지 이어지는 내용들을 그린다.
1-3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바울 일행은 밀레도에서 고스, 로도, 바다라, 구브로를 지나 수리아 지방 두로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있던 제자들을 만나 공동체 안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었다(4). 그런데 갑자기 제자들이 바울에게와 성령님께서 주신 감동으로 말한다며 예루살렘을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바울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이어지는 5절을 참고해볼 때 그는 처음 계획대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렇게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사랴에 이른 바울 일행. 그들은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명인 빌립에 집에 들어가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빌립의 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가가 오더니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겪게 될 고난에 대해 예언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많은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 것을 권한다. 하지만 바울은 이번에도 그들의 간곡한 권면을 뿌리친 채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오늘 우리는 여정의 끝을 다루는 가운데 성령의 이름으로 권면했다던 두로와 가이사랴의 장면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두 장면에서 언급된 성령하나님의 뜻이 앞서 바울이 결단하고 나아가려 했던 것(20:22-24)과는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성령님은 한 분이신데 왜 이쪽에서는 이렇게, 저쪽에서는 저렇게 달리 말씀하시는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2. 해석: 본문 연구
앞선 내용을 참고해볼 때, 사실 바울은 애초부터 연보 때문이라도 예루살렘에 가려 했었다(19:21; 고후 8:1-2). 거기에 에베소 장로들 앞에서 한 그의 결단을 보면(20:22-24), 그는 마게도냐에서 앗소로 이동하면서 앞으로의 사역을 하나님께 여쭤보았고(20:13-16), 아마 그때 성령하나님을 통해 어떠한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바울이 그때 받은 감동은 비록 예루살렘에 결박과 환난이 있을지라도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행 21:4을 보면 바울의 제자들이 말하길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성령의 감동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뒤이어 선지자 아가보가 등장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이 있을 거라고 종지부를 찍는다. 이 말을 들은 그곳의 동역자들은 앞선 두로에 있던 제자들과 똑같이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반대하기에 이른다. 바울이 성령님께 받은 감동과 제자들, 그리고 아가보가 받은 성령님의 감동이 대립되는 이 상황은 어떻게 된 일인가? 성령님께서 사람마다 다른 감동을 주신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지금 성령님의 이름을 남용하여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실하신하나님의 성품 상 첫 번째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문맥을 살펴볼 때 두 번째 또한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세 감동(20:22, 21:4, 11) 가운데 드러나는 성령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 성령님이 정확히 무엇을 말씀하셨는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바로 문제 안, 그러니까 21:11에 있었다.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그리고 두로의 제자들에게, 아가보에게 주신 공동체적으로 주신 감동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동일한 감동을 두고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복음을 위해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라고 결단한 것이고, 두로의 제자들은 바울을 생각해 그렇다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공동체적 권면을 한 것이고, 마지막으로 빌립의 집에서의 사람들 또한 굳이 가셔야 합니까!”라고 권면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동일한 감동을 두고도 개인마다, 공동체마다 각기 다르게 받아들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린 2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성령님께서 감동을 주셨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운데 살아가다보면 일상에서, 혹은 기도함에 따라, 혹은 특정 상황에 따라 성령님께서 감동을 주시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방금 살펴본 것처럼 감동을 받은 것에 따른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적극적인 자세로 결단을 통해 삶의 변화를 꾀하려하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감동을 받았음에도 소극적인 자세로 (좋게 말해서)‘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경우가 있다. 반응에 따라 옳고 그름을 하나하나 논할 수는 없겠지만 본문을 참고해 볼 때, 감동을 받은 자로써 바람직한 반응은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성령님께서 이유 없이 우리 마음 가운데 감동을 주시겠는가?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가기를 원하시는 마음으로 감동을 주셨냐는 것이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면 부름에 따른 이유가 있듯이, 누군가 선물을 주었다면 선물을 준 이유가 있듯이, 성령하나님께서도 감동을 주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에 우리는 그 이유를 여쭈며 적극적인 모습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바쁜 세상을 핑계하며 소극적인 자세로 우두커니 있지 않도록 주의하자. 사탄은 우리가 성령님의 감동에 적극적으로 반응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결코 두고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요즘 자신의 상태가 영적으로 둔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는가? 지금 사탄의 꾀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 우리의 반응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는 우리에게 있어 정말 실질적인, 실천적인 결단을 요하는 부분이다. 바울에게 임한 성령의 감동은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어를 살펴보면 기다린다.’는 표현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라고 말씀하시기보다는 바울의 결단을 기다리셨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결단을 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렇게 결단한 것인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바울은 복음 앞에서 자신의 생명조차 배설물로 여겼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3:8). 그에게 있어 결박과 환난은 비록 두려웠을지라도 넘어야 할, 넘을 수 있는 산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바울의 결단을 봐야 한다. 그는 두로의 제자들처럼, 그리고 빌립의 집에 있던 동역자들처럼 충분히 예루살렘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고 이방선교의 문이 닫혔을까? 그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가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을 뿐이지,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른 길로 계속해서 사용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 앞길에 대해 계산하거나,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성령의 감동이 주어졌을 때 비록 부담이 되었겠지만, 그 부담되는 길을 택했다. 바로 이것이다. 감동에 따른 우리의 반응은 바로 부담이 되는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인간은 누구나 다 부담 받기를 싫어한다. 가뜩이나 힘든 삶에서 무언가를 더 어깨에 지고 살아가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점에서 달라야 한다. 우리는 마냥, 단순히 편하고 쉬운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남들이 가지 않는, 꺼려하는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항상 고통가운데 살아가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더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제고 그 부담을 껴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깨에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갈 때 나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내 가족, 이웃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논리이다. 바울 또한 언제든지 편하게, 쉽게 살면 그렇게 살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가 취한 반응은, 선택한 결단은 부담이 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러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단이 바로 우리들에게도 필요하다.

#3. 적용 및 결단
오늘 본문에서 드러난 바울의 모습을 통해 생각하며 정리해보자. 바울은 성령님께서 주신 감동에 가만히 있지 않고, 적극적인 반응으로 결단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3-24)”,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21:13)” 그의 결단은 자신의 손익을 떠나 오로지 복음전파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기꺼이 부담을 안고 앞으로 나아갔다.

바라기는 바울을 이끄셔서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하신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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