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eoulos

사도행전 21장 27-36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21장 27-36절

텔레울로스 2018. 8. 1. 09:12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1. 관찰: 본문 요약
예루살렘 교회공동체의 권면으로 율법을 시행하고 마무리하던 때에, 성전에 한 유대인들이 찾아왔다. 본문에 따르면 그들은 아시아로부터 온 자들, 특별히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방문한 것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들은 에베소에서부터 바울의 대적자들로, 하필이면 이때 성전에서 바울을 보게 된 것이다. 이들은 바울을 보자마자 주변의 유대인들을 충동해 바울을 붙잡고 고발했다. 고발의 내용인 즉 모든 지역에서 백성과 율법, 성전을 비방했다는 것과 엄격한 성전 법을 어기고 헬라인을 성전 안으로 들여보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고발은 감정에 사로잡혀 근거조차 없는 고발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의 동역자이자 에베소 사람인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있던 것을 생각해 그를 성전 안으로 들여보냈을 것이라고 확신에 찬 추측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성전 법에 의해 사형을 당하는 것이 마땅했다(다른 건 몰라도 성전 법 같은 경우, 당시 로마인들조차 존중했던 부분이었다). 그만큼 민감한 사안임에도, 대적자들은 단순 추측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울을 고발해버렸고 성전에 있던 열성 유대인들은 당연히 바울을 죄인취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내쫓고 죽이려 들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그 지역을 관할하던 천부장이 이 소식을 빠르게 듣고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현장을 방문했다. 그리고 논란의 중심에 있던 바울을 결박하고 어찌된 상황인지, 바울이 누군지 물었다. 그러나 성난 유대인들로 인해 현장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자 그는 바울을 이끌고 자신의 영내로 들어가려 했다. 유대인들의 분노가 어찌 그리 큰지, 바울을 이동조차 시키지 못하게 되자 군인들이 그를 들고 영내를 빠져나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끝까지 로마군을 쫓으며 바울을 없애야 한다고 외쳐댔다.

#2. 해석: 본문 연구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이 있을 거라는 성령의 감동(20:23)이 실질적으로 시작되는 부분이다. 비록 내키진 않았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동체의 권면에 순응했던 바울의 결정은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 있어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대적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모함으로 죽음의 바로 앞까지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천부장의 재빠른 모션이 바울을 살리게 되었다. 이처럼 그가 겪는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보면 앞뒤 사건들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하나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경을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 이어지는 내용과 함께 생각해 볼 때, 바울이 겪는 환난은 단순히 인간적 차원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섭리라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이는 35절에 나타난 한 단어에 의해 그 의미가 더 강조된다. 들려가니라는 단어는 나르다. 운반하다. 지다. 지니다.’를 뜻하는 헬라어 βαστζεσθαι의 동부정사 형태로 본문에서는 들려가다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사도행전 내에서 바울이 주님을 만나 사명을 받게 되는 장면에서 사용되었는데(9:15), 이때 ‘(내 이름을)전하기 위하여에서 전하다.”로 사용되었다. 이를 정리해볼 때, 바울이 지금 맞닥뜨린 상황은 위기를 넘어 안전한 곳으로 갔다기보다는(성전에서 군 영내), 자신의 사명의 자리로 가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유대인들의 걷잡을 수 없는 폭행으로)로마군에 의해 들려 옮겨지는 바울의 모습은 앞서 다메섹 성벽에서 광주리를 타고 도망가는 모습(9:25)처럼 우습기 짝이 없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자신의 마지막 사명을 위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로마로 이끌림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온전히 섭리의 한 측면이라는 것이다.

이때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이시듯, 이러한 섭리 또한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그대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위기의 순간들, 이것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다분히 고통이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그때,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도록 하자.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안경으로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게 되면, 지금 자신이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한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될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처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주셨던 사명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계단의 중간쯤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인이 되어 대학생으로써의 새로운 삶을 누리더라도 한 학기에 2번씩 찾아오는 시험기간처럼, 밝은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두운 밤을 지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그 누군가에겐 이 섭리라는 단어가 마냥 의지적으로 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만큼 지금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섭리보다는 사명이라는 단어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섭리가 인간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현실과 인내를 요구한다면, 사명은 다시금 그리스도인으로써 뛸 수 있는 에너지와 감동을 가슴에서 불러 일으켜주기 때문이다.


#3. 적용 및 결단
바울을 보자.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전하기(βαστζεσθαι)위해 부름을 받은 자로써, 하나님에 의해 들려간(βαστζεσθαι)자였다. 지금 우리가 살아내는 이 삶 또한 동일한 원리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끌어 가고 계신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 그러니 기억하자. 지금 우리는 들려가는중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기억하고, “들려가고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럴 때,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계속, 천국 가는 그날까지 인도해주시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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