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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5장 1-12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25장 1-12절

텔레울로스 2018. 8. 31. 19:31

1.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2.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3.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4.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5.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6.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7.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8.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1. 관찰: 본문 요약
벨릭스에 이어 총독이 된 베스도는 부임하고 얼마 후 예루살렘으로 떠난다(1). 전에 바울을 고발했던 유대인 무리들은 새로운 총독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금 바울을 죽이기 위한 계략을 짠다(2). 그들은 전에 실패했던(23:12-15) 암살작전 카드를 다시 꺼내지만(3), 총독 베스도가 부탁을 거절함에 따라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 내막을 살펴보면(4-5), 베스도는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일은 굳이 하지 않으려고 했던 자 같다. 이후 베스도는 가이사랴에서 유대인들의 고소를 받아들여 2년여 만에 다시 재판을 여는데(6), 양측의 발언 가운데 바울이 죄인이라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한다(7). 이에 손익에 머리회전이 빨랐던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마음이라도 얻고자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의 재판을 제안하지만(9), 바울은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오로지 로마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바울은 예루살렘이 아닌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를 요청하고(10-11), 베스도는 배석자들과의 상의 끝에 로마 시민인 바울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다(12).

#2. 해석: 본문 연구
이 본문에서 집중해야 할 부분은 더 악해지는 상황 속에서 바울이 취하는 태도이다. 손익에 머리회전이 빨랐던 새로운 총독 베스도의 부임과 이에 따라 다시 시작된 유대인들의 암살 작전은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데 있어 방해받기 좋은 환경(?!)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가운데 바울이 취한 행동은 무엇이었나? 9-11절에서 보여 지는 바울의 요청에서 우리는 확인해볼 수 있다.
사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바울의 심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그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겠냐는 베스도의 진의까지는 알지 못했겠지만, 예루살렘까지 가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산헤드린 공회 또한 바울을 적대시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울은 지금 헤롯 성에서 2년이 넘게 구류되어 있다는 점에서 두려움과 불안함이 공존했을 텐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재판과 유대인들의 고소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이사랴나 예루살렘이 있는 것보다 오히려 가이사 앞에서의 무죄를 선고받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여러 정황들을 고려해볼 때, 바울에게 있어 가이사에게로 가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연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적인 생각일 뿐, 그가 가이사에게로 간다고 요청했던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그것은 주님께 받은 사명 때문이었다(23:11). 그는 상황적 두려움과 불안함 속에서도 로마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붙잡고 나아간 것이다. 가이사 앞으로 나아가기 원했던 것은 어쩔 수 없던 것도 아니요, 흘러가는 데로 자신의 몸을 맡긴 것도 아니요, 두려움 때문도 아닌 사명에 따른 자신의 결단이었던 것이다.

이런 바울의 태도를 거울로 삼아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살펴봐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두려움에 직면할 때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두려움이란 단순히 무서움의 감정을 느끼는 것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써 합당한 결단을 하려고 할 때 파생되는 결과론적인 면에서의 두려움을 뜻한다. 이러한 종류의 두려움이 찾아오게 될 때, 우리는 이것저것 재고 있는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써 마땅한 태도를 취했을 때 찾아오게 되는 고난에 대한 두려움과, 한 번쯤은 그럴 수 있다며 자신에게 편한 쪽으로 태도를 취했을 때 찾아오게 되는 편안함 사이에서의 고민 말이다.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갈등은 한 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것이다. 이때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사실 답은 그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잘못된 것을 택함으로 넘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더 자주 접하게 된다. 자신에게 낙담해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이에 우리는 위 본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이 고민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갈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써 정도를 걸어 나아가는데 유익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바울의 태도에 있는 것이다. 바울이 취했던 태도,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날 우리가 이 상황에서 취해야 할 태도는 바로 사명을 기억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갈팡질팡하는 그때 그 순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그 순간, 단순히 인간적인 생각과 잼을 통해 결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냥 흘러가는 데로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은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을 기억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때, 우리의 심령에 세상을 향한 사탄의 목소리가 아닌 성령의 음성이 들릴 것이며, 바로 눈물짓게 될 후회의 모습이 아닌 주님께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항상 깨어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주셨던 그 사명을,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말씀해주셨던 그때의 그 감동을 말이다.


#3. 적용 및 결단
인간은 연약하다.’라는 이 명제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불신자나 신자나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만큼은 예외의 경우가 존재한다. 바로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이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 자신의 의지로 사명을 기억하여 위와 같은 결단을 이뤄내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때 당시 불굴의 의지로 노력할지라도 결국 안타까운 결론에 이르게 되리라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구해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을 기억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며 그렇게 매번 찾아오는 갈등의 그 순간.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게 되는 축복 또한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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