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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5장 13-27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25장 13-27절

텔레울로스 2018. 9. 3. 00:38

13.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14.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17.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18.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19.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20.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21.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22.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24.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25.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26.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27.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1. 관찰: 본문 요약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기로 결정된 이후, 신임총독 베스도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아그립바 왕과 그의 누이 베스도가 찾아온다. 이때 베스도는 유대사건을 훤히 꾀고 있는 아그립바 왕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 도움이란, 증거 하나 없이 단순히 종교문제로 벌어진 바울의 고발 건을 어떻게 정리하여 황제에게 올리냐는 것이었다. 이에 아그립바는 자신이 직접 바울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고, 베스도는 바로 그 다음날 바울을 그의 앞에 불러놓는다.

#2. 해석: 본문 연구
길어 보이는(?!) 위 본문의 내용은 사실상 아주 간략하다. 황제에게 올라가야 할 사건 경위서 작성을 위해 바울이 다시 죄인의 취급을 받으면서 아그립바 왕 앞으로 나온 것이다. 사실 신임총독 베스도의 입장에서도 답답했을 것이다. 자신이 부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에 나름 영향력 있는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바울의 사형을 주장하는데, 이를 인정할만한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건 처리 그 자체에 대한 어려움이 아니라, 가이사에게로 보내야 할 사건 경위서 작성에 따른 바울의 죄목이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베스도는 분명한 증거가 없음에도, 바울을 이미 죄인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25:27).

하지만 오늘 우리는 본문의 이 상황을 단순히 육신의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사실 누가 봐도 본문에서의 갑은 아그립바 왕이며, (을병)정은 바울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그립바는 권력의 중심에서 위엄 있는 모습으로 바울을 내려다보고 있지만, 바울은 죄인의 자리에서 아그립바를 올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황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이들의 위치는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과연 누가 진정한 죄인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인가? 과연 하나님의 눈에 누가 죄인인 것인가? 그렇다. 답은 정해져 있다. 재미있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패턴을 진즉부터 보여주셨다. 유대인들에 의해 고발당한 바울의 모습을 잠시 돌이켜 보자. 천부장에게서 벨릭스에게로, 그리고 베스도로 넘어와 결국 오늘의 본문에 등장한 아그립바 왕에게까지, 그는 계속해서 죄인 취급을 받으며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비록 세상에서 볼 때 그는 계속해서 죄인의 자리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그는 계속해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그가 죄인이었기에 천부장에서부터 아그립바 왕에 이르기까지 심문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천부장에서부터 아그립바 왕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죄인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의인이 된 바울을 통해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케 하신 것이다. 결국 의인 바울은 복음을 들고 있었을 뿐, 하나님께서는 그 앞에 세상에 영향력 있는 죄인들을 모두 세우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섭리이자 일하심이란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은 시선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비록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우린 가진 것 하나 없는 부족하고 가난한 사람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복음을 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부요한 사람인 것이다. 비록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우린 당장 내일 뭘 먹고 살아가야 하나 걱정 많은 하루살이 인생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내일도, 모래도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풍성함 가운데 살아가면 되는 자인 것이다. 비록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우린 친한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자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린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 따라 각 지체와 풍성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한 지체인 것이다. 비록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우린 많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며 원치 않는 절제가운데 살아가는 어리석자로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시선에서 볼 때 우리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 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인 것이다. 그 시각 안에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가 자신의 시각에서 살아가기를 주장한다. 그렇게 우리를 조종하려 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시각에서 있어야 할 그 자리를 떠나려 든다. 마치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처럼 만들려고만 하는 것이다.

#3. 적용 및 결단
이에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를 더 이상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 즉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 것을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사에 깨어 있어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해서 우리의 이성으로 모든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하려 하면 사탄은 우리의 생각과 눈에 보이는 그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게끔 만들 것이다. 하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하며, 충만함 가운데 살아갈 때 성령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을 영적인 눈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는 더 이상 부끄럽거나 잘못되었다거나 문제가 있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섭리의 한 가운데 서있게 된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깨달음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고 그리스도인으로써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기억하자.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는 다른 누구의 자리도 아닌, 우리 자신의 자리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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