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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4장 24-27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24장 24-27절

텔레울로스 2018. 8. 30. 23:59

24.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26.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27.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1. 관찰: 본문 요약
고발자들의 내용과 바울의 변명을 듣고 난 벨릭스는 천부장의 편지까지 고려했을 때, 여기에서 충분한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음을 알고 재판을 연기했다. 이후 벨릭스는 수일 동안 바울을 따로 불렀는데, 이는 24절에서와 같이 그의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이 주장했던 복음을 듣기 위함이었다. 역사가에 의하면 벨릭스 본인보다도 그의 아내 드루실라가 바울의 이야기를 더 듣기 원했다고 한다. 무튼 바울의 입장에서 총독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그는 25절에서와 같이 의와 절제, 심판에 대해 강론하기 시작했다. 이를 듣던 벨릭스는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혀 바울을 그 자리에서 물리게 말았다. 아직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6절에 의하면 바울과 대화를 나눈 것은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다. 벨릭스는 자주바울과 복음에 대해 나누었다. 중요한 것은 벨릭스가 단순히 복음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을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복음과 더불어 뇌물받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바울의 화려한 스펙과 행 24:17의 내용을 참고해 볼 때, 현재 구금되어 있는 바울에게서 충분히 뇌물을 상납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더 자주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나 벨릭스는 어느 시점에서 알았을 것이다. 바울이 자신에게 뇌물을 상납하지 않을 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울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앞의 내용과 27절을 참고할 때 벨릭스는 바울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하여 바울을 무려 2년간이나 구금해둔 것이다.


#2. 해석: 본문 연구
4절의 짧은 본문에서 드러난 벨릭스의 모습은 누가 봐도 탐욕적인, 그리고 진실치 못한 세속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충격적인 사실은 이러한 벨릭스의 모습이 결코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벨릭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24절에 드러난 그의 모습은 복음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복음의 일정부분을 듣고 두려움 가운데 바울을 물렸지만(25), 이러한 그의 모습은 불신자에게서 보여 지는 아주 일반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무관심한 것보다 더 나은 반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와 상반된 모습이 바로 26절에서 나타났다. 바로 ’, 이다. 그렇다. 그는 분명히 복음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돈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바로 이 부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이 부분이다. 벨릭스의 모습은 결코 남의 모습 같지가 않아 보인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은가..? 복음만을 붙들고 살아갈 것처럼 고백했던 매주일의 결단은 월, , 그리고 수요일이 되면서 어느 순간 흐려지더니 무엇이 우선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리고 만다. 목적이었던 복음이 어느새 수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땅을 잘 살아가기 위한 수단 말이다. 이러한 자신의 상태를 나름 인식했을 땐 그래도 다시금 돌이킬 수 있는 기회라도 존재하지만, 인식조차 하지 못할 땐 그렇게 벨릭스처럼 우리는 한 주를 살아가게 된다. 복음을 붙들고는 있지만 그 바로 옆에 이 땅에서의 풍요를 위해, 명예를 위해,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한 보물 창고를 쌓아가면서 말이다. 나만의 바벨탑을 쌓으면서 말이다.
혹시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벨릭스는 분명히 불신자인데, 신자들의 모습과 비교한건 너무한 게 아닌가요?” 그렇다. 불편한 게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더 불편한건, 이런 벨릭스의 모습이 정말 내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마냥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복음이냐, 세상이냐가 아니라 복음과 세상 둘 다를 섬기면서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16:13). 계시록에서는 이렇게 단언한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3:16)”고 말이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결코 이 땅에 시민권을 두고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니 선택해야 한다. 좋든 싫던 세상이냐 하나님이냐를 말이다. 성경은 결코 둘 다를 섬기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만을 택하라고 명령한다.
안타깝게도 벨릭스는 이 둘 중에서 세상을 택했다(27). 무려 2년이 지난 후에, 그는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께로 갔다느니, 회개를 했다느니, 바울을 다시금 불렀다고 하지 않고 되레 유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한 자로 남았다. 그렇게 그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택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한다. 세상을 택한 자의 끝은 심판이라고, 그리고 그 심판의 결과는 지옥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선택의 결과를 말이다.


#3. 적용 및 결단
말씀을 정리하며 27절의 이 말씀을 지금으로부터 2년 뒤의 우리의 말씀으로 한 번 생각해보자. 대입해보자. 과연 우리의 2년 후의 모습은 어떠할까? 벨릭스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자가 되어 있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써 살아가고 있을 것인가(13:22)? 혹시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가? 자신의 모습이 벨릭스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낙심하고 있는가? 괜찮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충분히 넘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충분히 헤맬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언제고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까지 그럴 수 있다.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의 모습이다. 지금까지 그랬다면, 회개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으면 된다. 지금까지 벨릭스와 같았어도 앞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러지 않으려 발버둥치면 된다. 비록 그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저 천국으로 인도해주실 성령하나님께서 그날까지 우리와 함께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대하자. 그리고 기도하자. 2년 후 우리의 모습이 더 이상 지금까지와 동일한 반복이 아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살아가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자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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