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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6장 9-12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26장 9-12절

텔레울로스 2018. 9. 5. 13:42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안타까움에서 시작된 바울의 변명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9-23절까지는 바울이 왜 고발당하게 되었는지 자신의 삶을 들어 하나하나 설명한다. 특별히 이 부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본문은 전반부에 해당되는,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주님을 만나기 전 그의 삶은 크게 3가지의 모습으로 압축해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종교적으로 무엇인가를 행해야 구원을 받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9). 이는 바리새인의 특징이자, 유대법에 의하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별히 행동의 어떠한 기준을 통해 안식일을 지키고 아니고에 대한 규율이 있는 유대교의 안식일 법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러한 도덕법은 지키지 못한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전제 하에 정해진 규율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당시 최고의 학자라고 할 수 있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웠던 바울이었기에, 이러한 규율을 지키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철저하며 엄격하게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살아갔다는 것이다(10-11). 사실 유대교에 있어서 바울은 배운 대로 행하는 아주 성실한 바리새인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 율법을 어길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유대교에 반한 가르침을 전파한다면, 바울 뿐 아니라 다른 바리새인들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독실한 스승에게 배웠던, 엘리트 출신이었던 바울에게 있어 이런 상황을 그냥 쉬 넘어갈 리가 없다. 그렇기에 그는 반역자이자 이단으로 여겼던 그리스도인들은 모독하고, 격분하여 박해했던 것이다. 그의 노력과 열심 그 자체는 가상한 것이었으나 분명 잘못된 방향으로의 열심이었다. 세 번째는 자신의 정체성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갔다는 것이다(12). 12절에 맨 마지막 동사를 살펴보자. 바울은 외국 성에까지, 그리고 다메섹에까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떠났다. 이러한 그의 열심은 말 그대로 자신이 의지적으로, 능동적으로 해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 불과하다. 왜냐하면 중생하기 전 인간은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듯이 모든 인간은 죄의 왕국에서 태어나 사탄이라는 왕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여기에서 더 안타까운 것은 정작 중생치 못한 자들은, 그러니까 죄의 왕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사탄을 왕으로 모시며 살아간다는 이 사실조차, 사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는 이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당시 바울 또한 동일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능동적으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 사탄의 심복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이러한 끔찍한 모습들이 중생하기 전 바울의 삶이었다.

 

본문을 12절로 끝낸다는 점에 있어 한편으로 아쉽고 희망적이지 못한 점이 있지만, 여기에서 아직 남아 있는 우리의 쓴 뿌리들을 살펴봐야 한다. 누구보다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인 또한 중생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로 인해 넘어지곤 한다. 이러한 넘어짐은 육체를 입고 있는 한 평생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상이 너무나도 악해지다보니 이러한 죄의 행동들은 종종 그리스도인이?!’라고 반문을 할 만큼 그 깊이나 강도가 심해졌다.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도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매 순간 나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무릇 지킬만한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지 않는다면, 오늘 본문에서 드러난 바울의 모습이 혹 우리의 모습이 되지 않는다고 결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바울의 모습 3가지를 통해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자. 혹여 지금 난 무엇인가 함으로써 구원을 스스로 이루려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 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간다고는 하나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을 향해 열심을 다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 내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악한 사탄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우리가 가는 길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잠깐 눈 깜빡하는 사이에 표지판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한다. 이 깨어있음은 잠도 자지 말고, 하루 24시간 온종일 기도만 하라는 것도, 성경만 보고 있으라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깨어 있음은 위 성찰의 질문들을 생각하며 본질을 붙들라는 것이다. 그 본질이란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원은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다(6:57; 3:4).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방향은 내 생각과 계획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다(3:14). 우리의 정체성은 더 이상 사탄의 노예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양자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다(8:15-16). 이처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의 답이 되실 뿐이다. 이 본질을 붙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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