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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6장 19-23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26장 19-23절

텔레울로스 2018. 9. 6. 09:16

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울의 변명 마지막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본문은 바울이 주님을 만난 이후 변화된 모습을 그리고 있다. 본문의 시작인 19절의 첫 단어는 바울이 하려고 했던 변명의 실질적인 시작을 알린다. 아그립바 왕이여주님을 만난 바울의 분명한 변화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그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한 이유 또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하늘에서 본 것을 거스르지 아니하고 주님을 만난 이후, 그가 취했던 첫 반응은 이것이었다. 바울은 순종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찾아와 말씀하신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빛나는 영광으로 오신 그분을 결코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을, 그리고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이다.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행함으로 다메섹에 갔던(26:12)’ 그 능동적 태도와는 반대되는 모습으로 전하기 시작했다(26:20).’ 동일한 능동적인 모습이었지만 그 동기는 180도 달라졌다. 변화된 그의 모습을 보게 된 많은 유대인들은 처음에 당혹스러워 했으나(9:22), 결코 그를 가만 둘리가 없었다. 세상은 그를 죽이고자 달려들었다(26:21). 스데반이 박해를 받아 죽게 되는 그 상황처럼, 바울에게도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위협에도 바울의 선교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한들, 그럴 때일수록 바울은 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복음을 전했다. 이것이 그가 고발을 당한 이유였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바울이 말했던, 그리스도인으로써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귀한 영적 원리를 알 수 있다.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때를 기억해보자. 감히 그 누가 부르심 앞에 불순종할 수 있겠는가? 아마 바울도 동일했을 것이다(19). 찬란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현 앞에 강성했던 바울마저 그대로 순종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분의 영광에 압도당한 자는 결국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순종은 순종 그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모습처럼 그에 합당한 열매로 이어지게 된다. 고난과 위협은 잠시 잠깐 있는 세상의 반응일 뿐, 그리스도인들은 다시금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진정 그리스도를 만난 자라면, 성령하나님께서 그를 반드시 돕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문의 말씀을 붙들고 한 번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회개의 합당한 일을 하고 있는가? 고위고하를 막론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말이다. 만약 이 질문에 라고 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시금 말씀 앞으로 나가야 한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단순히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 순종마저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 앞에 엎드리게 하시는 성령하나님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자,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령하나님의 도움이 전제되어 있지 않는 의지는 행 26:12에서 보였던 중생 전 바울의 모습만을 드러낼 뿐이다. 죄성에 이끌린 의지는 잘못된 열심,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찢겨진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때, 바울을 도우셨던 성령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그 뜻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이며, 우리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를 온전히 증언하게 하실 것이다. 감사하게도 이 모든 과정들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끔 인도해주실 것이다.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사실인가. 세상의 위협? 우리를 옭아매는 상황들? 걱정하지 말자. 당장은 우리의 삶을 흔들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지만 결국 이것들은 우리가 더 성령하나님께 붙들림 받게 만드는 하나의 도구가 될 뿐이다. 더 나아가 이것들은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일 뿐이다. 바울이 고발당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았는가? 그러니 기억하자.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자 최선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분 앞에 설 때, 우리는 숨을 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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