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eoulos
사도행전 26장 13-18절 본문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바울의 간증과도 같은 변명. 9-12절에서 묘사된 중생 전 바울은 결코 한 명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투지가 담긴,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13-18절은 바울에게 있어 인생의 전환점이자, 평생 자신이 살아가는 목적이 되는 사명을 받는 사건을 담고 있다. 지난 날 자신의 어리석은 삶을 뒤로 한 채, 전인격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주님과의 만남이 그려지고 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사명보다도, 만남 그 자체에서 드러난 특징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들을 다시금 상기하려 한다.
바울에게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 이 사건은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 번째 바울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고 있을 때를 생각해보자. 바울은 혼자 간 것이 아니라 동행들이 함께 가는 중으로(13), 그때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동일하게 보고 엎드렸지만 그 가운데 바울만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바울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선택받은 자였다. 사명을 받은 선택받은 자였다.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도 구원을 받은, 선택된 자였다(17). 두 번째 주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앞서 다루었듯이 주님은 2가지 형태로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그리고 소리로 말이다(13-14). 놀라운 것은 직접적으로 자신을 밝히 드러내셨다는 점이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던 시대야 인간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축복을 아주 자연스럽게 누릴 수 있었지만, 승천 이후 예수님을 이렇게 만날 수 있던 자는 몇이나 되었을까? 사람에 따라 환상을 해석하는 것에 다름이 있겠지만,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과 만난 이 사건을 환상이라기보다는 직접적인 만남 그 자체로 본다. 이런 점에 있어 이 사건은 단순히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으로 그 의미를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직접 ‘계시’하셨다는 점에 있어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니라, 실제 자신의 눈앞에 계시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세 번째 주님께서는 바울을 사역의 자리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뒤, 새 삶을 주셨다. 그 삶은 17절에 아주 간단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들에게 보내어 ⋯” 그렇다. 지금까지 사탄의 종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자신의 열심만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다메섹으로 ‘갔던’ 바울이,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들에게 역으로 ‘보내어진’ 것이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말하는 것이 바로 17절,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의 사역에 자리에 보내셨다는 것이다.
방금 살펴보았던 이 3가지 특징들은 오늘 우리가 잊고 있던 주님과의 첫 만남을, 그리고 지금 놓치고 있는 귀한 사실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스스로에게 한 번 질문해보자. “우리는 선택받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진정 알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지금 사명의 그 자리에 서 있는가?” 과연 이 질문 앞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몇이나 될까? 조심스럽게 추측컨대 바울이 주님을 만난 이 사건의 경험만큼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된다. 이 말인즉, 우리가 그만큼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이다(갈 1:15; 엡 1:5). 미국 인구조사국에 의하면 17년 12월 말에 추산된 세계 인구는 대략 76억 명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76억 명 중 한 사람으로, 그 중에서 선택받은 자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선택받지 못해 끝내 지옥 불의 심판을 받게 될 터인데, 우리는 태초부터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한 기업을 얻을 뿐 아니라(18), 하나님을 아빠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롬 8:15). 최종적으로 주님의 재림 때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롬 5:21). 이것이 바로 선택받은 자가 누리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축복이다. 이러한 축복을 누리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사실을 분명 알고 살아가고 있는가?
다음으로 우리는 대답해야만 한다. 진정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이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착각하는 명제가 있다. “저는 그리스도가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실제 삶 가운데 경험하여 알게 된 그리스도가 아니라,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 모두라고 감히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그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는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 ‘그 자체’이다. 그리스도 그 자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지식이 아닌 삶으로 직접 경험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안다는 진정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진정 알아야만 한다.
마지막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사명의 자리가 맞는가?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들 또한 ‘보내셨다.’ 우리 각 개인에게 허락하신 사역지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삶 가운데 찌들어 사역지에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왜냐하면 사역지는 힘들기 때문이다. 외롭기 때문이다. 사역지에 있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우리 자신의 현실을 알았다면 결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충분히 넘어질 수 있다. 잊고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깨닫는 은혜조차 경험하지 못한 채 나락으로 떨어져 있을 때일 뿐이다. 깨달았다면, 회복되었다면 우리는 다시금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역지로 보내셨고, 지금 서 있는 모든 곳이 바로 사역지라는 사실을 말이다.
기도와 말씀의 기근이 심한 이 시대 가운데, 위 3가지 질문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회복을 바라는 원동력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그 회복이란 무엇인가? 그렇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선택된 것도 그분으로 인해 유효하게 된 것이며, 우리를 사역지로 보내신 것도 그분이신 것이다.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분으로 끝난다(요 1:3; 골 1:16). 알파와 오메가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소망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그분이 계시기에 지금 이렇게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간절히, 정말 간절히 바라기는 그 예수 그리스도만을 한 평생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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