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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eoulos

사도행전 28장 1-10절 본문

묵상/44. 사도행전

사도행전 28장 1-10절

텔레울로스 2018. 9. 17. 21:27

1.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7.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세상엔 많은 나라, 그리고 그에 따른 많은 언어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중국어가 참 다이나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중국에는 같은 단어에도 성조의 다름으로 뜻이 나뉘기 때문이다. 일례로 라는 단어는 네 종류의 성조에 따라 각각 뜻이 다르다. 우리나라에도 성조는 없지만 같은 발음에도 다른 뜻을 내포한 단어들이 존재한다. 일례로 배, 밤 등이 있다.

이처럼 성경에도 하나의 단어에 2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가 있다. 바로 기독교에서 필수 단어인 구원이다.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는 이미아직이라는 뜻을 함께 내포하는, 정말 특별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이미라는 뜻에서의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아직이라는 뜻에서의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앞서 정해진 구원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을 뜻한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자.

 

알지 못하는 섬에 떨어진 바울일행. 그들은 분명 목숨을 부지하긴 했지만,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인 배가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알지 못하는 섬에 떨어져 불안했을 것이다. 거기에 비가 오며 날까지 차니 심적으로 크게 위축되었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쑥 나타난 원주민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애시당초 인디언 부족을 전도하기 위해 선교지로 들어간 것도 아닌 상황에서 바울일행이 맞닥뜨린 현실은 무슨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스토리 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즉시 반전드라마가 펼쳐진다. 우리가 알고 있던 원주민의 개념과는 너무나도 상이하게, 그들은 바울 일행에게 특별한 동정을 느끼며 오히려 영접하고 있는 것 아닌가? 거기에 뱀에 물린 바울은 원주민들이 믿는 자연신에 의하면 당연히 죽어 마땅한데, 오히려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며 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니 이 무슨 상황인 것인가? 이에 바울일행은 목숨하나로 섬에 들어와 모든 것을 가진 채 다시 로마로 가는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바울과 그 일행은 당장의 큰 풍랑으로 인해 배가 침몰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구조되었다. ‘이미구원받은 것이다. 그러나 행 27:24-26에 의하면 아직완전한 구원은 아니었다. 바울과 그 일행이 아무 탈 없이 로마에 도착하는 것까지가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고,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게도 바울의 이 상황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아니 시기적으로 볼 때 본문의 시기와 오늘날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후, 그리고 재림 이전의 동일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멜리데 섬에서 로마에 가기까지 바울의 모습은, 마치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살아내는 이 땅에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본문을 통해 오늘날 방향성을 잃은 그리스도인이 살아내야 할 삶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려 한다.

 

구조된 바울이 서 있던 곳은 어디였나? 바로 멜리데 섬이다(1). 바울과 그 일행들에게 있어 멜리데 섬은 알 수 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곳으로 보내신 것이다. ? 결과적으로 그곳에 있던 원주민들 때문에.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도 동일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정, 학교, 직장, 큰집, 해외 등 우리가 서있는 모든 곳에 보내셨다.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어떤 곳도 처음엔 낯설고 예측할 수 없던 곳이었다. 그곳으로 보내신 이유는 바울일행과 동일하다. 그곳에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함이다. 그들에게 주님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는 삶 가운데 우리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바울일행을 구원하신 후, 미지의 땅에서 두려워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있던 자들을 통해 바울일행을 동정하여 따뜻하게 영접하게 하셨다(2).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녀들을 결코 가만히 두지 않으신다. 자신의 독생자를 통해 구원한 그의 양자를 독생자만큼 사랑하신다(8:38-30). 특별히 본문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3-6절이다. 사실 이 부분은 없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2절에서 바로 7절로 연결해보자, 이보다 더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하지만 누가는 이 부분을 넣었다. ? 바로 그 이유가 오늘 본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3-6절의 내용인 즉, 토테미즘의 신앙심을 가지고 있던 원주민들에게 있어 바울이 뱀에게 물렸음에도 아무런 탈이 없는 것은 그들의 기본적인 믿고 따라왔던 종교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원주민들은 3-6절을 통해 자신들이 지금까지 믿었던 토속신앙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 빈자리에 바울이 들어섬으로 그를 신처럼 여긴 것이다. 바울이 이 사실을 몰랐을까? 누구보다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했던 바울은 아마 이 사건의 본의를 하나님께 여쭙고 7절부터 복음의 소식들을 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마침 하나님께서는 원주민들의 대표를 통해 바울을 무대 위로 올리셨고 바울은 그 무대에서 성령의 능력을 발휘함으로, 원주민들을 고치며 하나님을 드러냈다. 결국 3-6절을 삽입하게 된 이유는 원주민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7-9절은 이 과정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의 자녀 삼으신 것은 우리를 통해 원주민과 같은 이 세상 사람들의 잘못된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진리,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론 바울처럼 뱀에게 물리기도 하는 것이며, 때론 바다에 빠지는 위험을 당하기도 하고, 때론 세움을 입기도 하는 것이다. ? 그 이름을 위하여(5:41, 9:15). 주를 위하여(14:8), 복음을 위하여(20:2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모습인 것이다. 마지막 10절을 살펴보자. 앞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다면(2), 10절은 하나님을 드러낸 자에게 주어진 은혜를 말하고 있다. 비록 유일한 이동수단인 배와 그 안에 있던 갖가지 모든 것들을 다 잃었던 바울일행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돌린 그의 자녀들에게 잃었던 것 그 이상의 것을 선물로 주셨다(42:10, 5). 배를 주셨고 로마로 갈 때까지의 모든 쓸 것을 주셨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케 하신 것이다. 여기까지가 진정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만 주신 것이 아니다. 그 사명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은혜위의 은혜(1:16) 또한 예비하셨다.

 

바라기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가운데 갈 길을 잃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좁은 길로 향하는 방향감각을 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문을 통해 회복되길 소망한다. 그들이 가야 하는 길이 어디인지, 그들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동서남북을 다 뒤져봐도 모르겠는가? 모르는 게 당연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들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답은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예수를 찾지 않으면 우리는 파선된 배에서 아등바등하다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를 찾지 않으면 우리는 섬에 갇혀 평생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예수를 찾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없다. 그러니 예수를 찾으면 된다. 그분을 찾을 때, 그분을 직시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하나 삶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12: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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