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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8장 16-22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28장 16-22절

텔레울로스 2018. 9. 27. 00:07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드디어 로마로 입성한 바울 일행. 죄인들은 옥에 감금되었겠지만, 바울은 특별히 호의를 입어 군인의 감시 하에 자유로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로마 지역에 있는 고위급의 유대 인사들을 자신이 머무는 곳으로 초대했다. 감사하게도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에 초대에 응해주었다. 바울은 그들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설명하며, 결국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복음 때문임을 말했다. 놀랍게도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려는 복음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들으려 한다.

 

로마에 도착해 유대인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준비하심이 4단계에 걸쳐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첫 번째, 16절을 보면 바울은 다른 죄수들과 구별되어 관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여러 번 백부장의 호의를 입었던 바울은 이번에도 특별한 호의를 입게 된 것이다. 사실 로마 시민으로서 바울이 아직 죄수임을 판명 받지 못했기 때문이 가장 큰 이유일테지만, 16절은 분명 바울에게 베풀어진 호의를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17절의 청함이다. 바울은 자신의 거처로 고위급 유대인들을 초대하는데, 이들은 바울의 청함을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그의 거처로 왔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21절의 서신이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죽이려 들었던 유대인들이 결코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역사적인 기록을 볼 때)현재 로마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해 마냥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보지 않았던 것은 아직 예루살렘 유대인들이 보낸 서신이 로마에 당도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로마로의 항해 중 온갖 환란을 겪었던 바울처럼, 이 서신 또한 이러한 이유로 아직 당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편지의 스케줄마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던 것이다. 네 번째22절로 열린 마음이다. 아직 예루살렘에서 온 서신을 받지 못한 로마의 유대인들이었으나 이들도 분명 유대인으로써 바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22절의 하반절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직접 바울의 그 사상을 듣기 원했다는 것은 이마저도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4가지의 상황들은 행 23:11의 말씀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인도하심이 단순히 바울의 복음 전파에 머무르기보다는, 23:11을 이루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성경은 구약, 신약으로 양분화되어 있다. 말 그대로 이는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뉘는데, 보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 중심엔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 이처럼 중요하면서도 우리가 자주 쓰지 않는 단어이자 개념이 바로 언약이다. 성경을 언약신학으로 바라보는 팔머 로벗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예언적인 죽음이 아니라 계약(언약)적인 죽음의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만큼 그의 신학에 있어 언약이라는 개념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비록 언약신학이 성경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중 하나일 뿐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런 귀한 개념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것도 자신의 아들을 버리면서까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두고 신실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우리가 그토록 보기 원하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직접 보고 경험했다. 그런데, 그것을 경험했음에도 그들이 십계명을 온전히 지키며 살아갔는가? 아니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바로 그런 존재다. 하나님을 경험했음에도, 눈앞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가 나타났음에도 그를 죽이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다.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뭐가 그리 예쁘신지, 뭐가 그리 사랑스러우신지 아들을 보내면서까지 언약을 지키려 하셨다. 우리가 실패하고, 우리가 깨버린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굳이 지키려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실패했는데 대가는 그가 치르시고, 우리가 깨버렸는데 죽음을 그가 당하시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 우리 때문에 자신의 말에 갇혀 속박된 것이다. 도대체 왜? 성경에서 이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진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추측에 근거해 말하자면 답은 이렇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언약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너무나도 슬픈 것은, 너무나도 화가 나는 것은 이 언약을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이 언약 때문이요, 우리가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것도 이 언약 때문인데 말이다. 그러니 본문을 통해 다시금 이 단어를 우리의 심령가운데 고이 모셔두자.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향한 언약 때문에 지금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 위해 지금 우리를 이곳에 부르셨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도 그 언약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 우리는 그 언약 한 가운데 서 있는 존재들이다. 이 사실을 매순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을 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로써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큰 은혜를 누리는 것처럼, 우리를 통해 우리 후손들이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기대하며 오늘도 언약을 묵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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