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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9장 10-19a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9장 10-19a절

텔레울로스 2018. 2. 23. 10:26

사도행전 9장 10-19a절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본문은 저번에 이어 바울 회심사건의 뒷부분으로 아나니아를 통해 진정 거듭나 회복되는 장면을 그린다. 10절에서 언급되는 그때란 바로 이전 9절의 상황을 그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지금까지 엘리트코스를 밟으며 나름의 열심으로 유대인으로써의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을 실제로 만난 뒤,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극히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이에 그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11). 바울이 바로 그러하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인정받는 아나니아(22:12)라는 주의 종에게 찾아가 사울을 찾으라고 명하신다(11). 이는 사울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12). 이로 보았을 때 그가 극심한 혼란 속에서 점점 주님의 뜻을 알아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주님의 부르심에 아나니아는 사울의 과거력에 걱정이 되었으나 주님께서는 가감없이 가라고 말씀하시고, 친절하게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신다(이 얼마나 인격적이신가!). 그렇게 아나니아는 주님의 뜻에 순종해 사울에게 찾아가 안수하자(17), 그 즉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 이때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이다. 중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세례를 받으며 주님의 자녀 됨을 언약적으로 확증받게 되었다. 마지막 19절은 그의 영적 회복을 떠나 식음을 전폐하며 상했던 그의 육체의 회복까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역시나 하나님의 사랑이다. 본문을 바울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10절의 그때에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사울은 극심한 혼돈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아마 그의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러우면서도 극심한 변화의 상태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우리 또한 사도 바울과 같이 인생을 살다보면 극심한 혼돈의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사람마다 겪는 정도의 상황이 다르겠다마는, 그 누가 시련의 때를 겪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누군가는 이미 그때를 무사히 통과하기도 했을 것이고 그 누군가는 아직 오지 않았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지금 그 시기를 통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고통의 시기에 빠져 지쳐있는가? 앞뒤에 막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가?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내일이 보이지 않는가? 걱정마지 말아라. 여러분들이 주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결코 그냥 두지 않는다. 뒤이어 언급되는 바울의 삶을 다시 볼 때, 비록 그가 깊은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롬 7:24에서와 같이 그는 완전한 유대주의자에서 구도자로 점점 변하고 있었다. 즉 그는 고통의 과정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통해 그를 향한 계획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가게 하신다. 그러니까 비록 지금 당장 내 인생에 답이 없고 고통의 나날들로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여러분들의 삶을 그냥 방치하지 않으시고 그를 향한 자신의 계획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져가게 만들고 계시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러분의 삶을 결코 그냥 방치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있다. 바울은 결국 아나니아의 만남을 통해 중생의 은혜를 입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임을 언약적으로 확증받게 되었다. 고통의 과정가운데 있더라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바울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계획가운데 때가 되었을 때 그의 종을 통해 우리의 상황을 밝히신다. 어둡고 절망과도 같았던 우리의 인생에 다시금 빛을 비춰주신다. 그 빛이란 단순히 내가 원했던 세상의 그 무언가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우리가 꿈도 꾸지 못하는 엄청난 축복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머리카락도(12:7), 우리의 모든 필요도 말이다(7:11). 혹시 지금 고통 가운데 있는가? 절망 가운데 있는가? 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포기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최상의 것을 주시려고 스케줄대로 움직이시는, 자신의 뜻을 이루고 계신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것이 있다. 절망의 때에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시고 최상의 것으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의 관점에서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장 좋은 것임을 그것은 세상의 것이 아니요,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됨이다. 영원한 천국이다. 혹시 지금 경제적으로 당장 먹고살기 어렵고, 관계가 깨어지고, 건강의 정도가 극에 달했는가? 여러분이 소망이 없고 슬픈 이유는 이 세상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생각할 때, 그러한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나 같아도 여러분들과 동일한 반응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해결책과 선물은 이 세상의 것을 넘어 영원한 것이다. 죽음 이후 우리에게 있을 최고의 선물인 바로 천국인 것이다. 그 천국에서는 고통도 슬픔도, 지금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없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에 죽으시고 구멍 난 못자국을 지닌 채 살아계신 그 주님과 함께 행복 오브 행복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베스트 오브 베스트의 축복이다.

아직도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교회에 나와 기도하면 세상의 많은 물질과 내가 원하는 지위와 명예를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명확하게 말하지만, 여러분들은 아직도 극심한 착각에 빠져 있다. 여러분들은 감히 하나님을 속 좁은 작은 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의 물질과 흔히 말하는 복을 주시려고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해 죽게 하신 것이 아니다. 착각 가운데 빠져 그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합당한 축복을 사모하기를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것이며, 그에 따라 우리에게 허락되는 영원한 생명의 삶인 천국 또한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감히 비교할 수 없겠지만 죽음 후에 찾아오는 천국에서의 삶은 신의 죽음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19절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섬세하신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한 사울의 육체를 회복시켜 주신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축복과 더불어, 연약한 우리를 위해 세상에서 필요한 것 또한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가? 아니 그 사랑을 알고는 있는가? 이 사랑을 안다면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비록 우리의 본성이 죄인이기에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자라도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랑을 깨닫는 자는 결코 의도적으로 죄를 짓기 위해 살아가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떠나 살아갈 수는 없다.

 

오늘의 이 말씀을 통해 당장 변하지 않는 상황에 얽매여 있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란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 거냐며 원망할 때가 아니라,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릴 때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여러분들을 향해 최고의 선물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지금 포장하고 계시는 과정 중이 있는 것이다. 혹여 오늘 교회에 처음 나오거나 아직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같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자 또한 자신의 종으로 삼으신 아주 배포 있고 아량이 넓으신 분이시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면 좋겠다. “사울을 바울이 되게 하신 하나님, 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저 또한 막막하고 답답한 이 세상에서 얽매여 살아가지 않고 영원한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시옵소서이렇게 고백할 때 사울에게 찾아가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찾아가실 것이며, 그렇게 여러분들은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주의 백성들이 될 것임을 확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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