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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0장 9-23a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10장 9-23a절

텔레울로스 2018. 3. 3. 15:03

사도행전 10장 9-23a절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저번에 언급했듯이 고넬료 사건은 교회사에서 아주 큰 의의를 갖는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어떤 점에서 의미가 있는지, 하나님 직접적인 말씀을 통해 우리는 볼 수 있다.


고넬료는 환상에서 받은 바, 말씀에 따라 그의 믿음직스러운 심복들을 베드로에게 보낸다. 그 사이 베드로 또한 고넬료와 같은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 환상에서 하나님은 레위기 11장에서 금지된 부정한 짐승을 먹는 그릇에 담아주시며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당연하게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율법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그 옛날 모세시대 때부터 지켜오면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복음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전하기를 우선시했던 베드로였음에도 이러한 전통 앞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명령과도 같은 어조에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지금까지 지켜왔던 전통에 대한 조건적 반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17절을 보면 베드로 또한 이러한 환상을 보고 속으로 의아해 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레 11장의 말씀을 어기시면서까지(?!) 베드로에게 명령하신 것인가? 하나님의 이 명령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들을 폐지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음을 베드로를 통해 선포하시는 것이다(2).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베드로는 아마도 22-23, 그러니까 고넬료의 심복들이 베드로의 집에 당도해 그들의 상급자인 고넬료라는 사람에 대한 소개를 듣게 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훗날 다시 나누겠지만 이 환상으로부터 시작된 이방인과의 하나 됨에 대한 깨달음을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나누게 된다. 베드로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교회가 알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또한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우리의 이성으로 결코 이해되지 못할 일들이 발생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게 이해가 되니?” 혹은 상황에 의해 이게 말이 되니? 지금까지 그렇게 한 사람이 어디에 있어? 태어나서 그렇게 했다는 사람 한 번도 본적이 없어!”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렇게 반응하거나 생각해봤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말 특별한 사람이나 상황을 제외하고는)인간은 본래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기존에 해오던 틀과 생각 안에서 무언가를 해나가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벗어나면 일단 당황하게 되고, 정도가 아예 예상치 못하거나 문화를 벗어난다면 심지어 반발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베드로 또한 감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럴 수 없습니다!” 라고 답하지 않았는가? (요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 무언인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생각을 깨게 한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라도 말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이 이와 같지 않은가? 관계에서나 무언가를 해 나감에 있어 문화적으로 물 흐르듯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내 예상대로 잘 되어가고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거나,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틀어버리실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 왔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은 이에 대해 당연하게 말할 것이다. 그동안 그렇게 해왔잖아~ 그냥 해”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자들조차 이렇게 반응할지도 모른다. 에이~ 이 정도는 뭐 어때서...” 어떤 사람은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이렇게 말은 하면서 말에 그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하나님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 말이 안되잖아요..!" 라고 따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대로 해라 이게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명확한 뜻이다.

내가 한창 자주 쓰는 말이 있다(물론 요즘에도 사용한다). 이 시대는 세상의 법이 진리를 누르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더욱 그럴 것이라 생각된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국가에서 재정하는 법이, 개정되는 법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그러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 아니겠는가? 이런 세상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아니 코앞까지 와있다. 이미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사람들과 싸우고 있는 모습들이 언론에 자주 잡힌다. 여러분은 이러한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떠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할 것인가? 흔히 말하는 적당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그것이 더 덕스러워 보이는가? 내 생각에 덕스러워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람들 눈에 그렇게 평가되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는가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적당함이 아니라 거룩이다. 이 말씀 앞에 자신의 모습에 더 잘 어울리는 단어가 적당함인지, ’거룩인지 성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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