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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장 27-30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11장 27-30절

텔레울로스 2018. 3. 13. 16:54

사도행전 11장 27-39절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본문은 이방 공동체의 시발점인 안디옥 교회의 지속적인 사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창 안디옥이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부흥의 물결이 퍼지고 있었을 때, 예루살렘에 있던 선지자들이 안디옥에 방문했다. 이들이 왜 온 것인지에 사도행전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이 와서 무엇을 한 것인가? 23절에 큰 흉년을 예언했다고 한다. 누가의 기록으로 비춰봤을 때, 예언한 아가보라는 인물이 거짓 선지자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진정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언했을 것이며, 결국 하나님께서는 다가올 흉년이라는 상황 속에서 안디옥교회를 향한 뜻이 있었다는 것이다. 뒤 이어지는 29-30절은 그 뜻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선지자의 예언대로 천하에 큰 흉년이 들었다(글라우디오: A. D 41-54).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전 세계적인 것인 기근은 아니기에, 요세푸스는 유대지역으로 한정지을 뿐 아니라, 이에 신약학자 F. F. 브루스는 큰 기근이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예루살렘 교회 뿐 아니라 안디옥 교회마저 좋지 않은 실정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29절을 보면 안디옥에 있던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이 각각 상황이 되는 대로 예루살렘에 사는 형제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들은 결정하기로 마음만 먹은 것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30절을 보면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전달했다고 말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통해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서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를 돕게 된 것이다. 특별히 이들의 부조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이처럼 성령님께서는 흉년이라는 상황 속에서 안디옥 교회를 통해 바람직한 교회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지 말씀하고 계신다. 바로 끈끈한 우정공동체이다. 정황상 안디옥 교회의 경제적 상황 또한 분명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각각 그 힘대로, 능력대로부조를 보내었다. 사실 이 부조가 얼마인지를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상황 또한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조를 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자들의 고통을 눈뜨고 지켜보지만 않았다. 말만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마음만 모으지 않았다. 물론 마음을 함께 해주는 사실만으로도 분명 큰 힘이 되겠지만, 그들은 실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물질을 나누어 예루살렘 교회에 보냈다. 사실 이러한 행위는 행 2장에 이미 보여줬던 모습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그러한 행위는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 예루살렘 교회는 주 안에서 형제, 자매라는 인식을 명확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우리에게 안디옥 교회 교인들과 같은 주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인식이 얼마나 있는가? 교회 내에 누군가의 아픔을 들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그 아픔에 함께 동참하며, 위로해주었는가? 얼마나 그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었는가? 동역된 모습이 얼마나 있느냐는 말이다. 끈끈한 우정까진 아니더라도 우정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모습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안디옥에서 정성껏 준비한 부조는 모여서 그 누군가를 통해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된 것이 아니다. 안디옥 교회를 위한 힘썼던 바나바와 사울의 손을 통해 전달되었다고 한다. 사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급으로 그 누군가를 통해 부조 전하는 일을 맡겼으면 되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당시 안디옥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약 790km로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서울-부산 왕복거리). 그렇다면 누가는 왜, 굳이 이 두 사람의 손이라고 표현한 것인가? 이는 결국 바나바와 사울이 직접 그 거리를 가서 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앞서 말한 안디옥 교회 교인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한다.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은 부조 보내기로 작정했을 뿐 아니라 실행했다면 그들의 영적 지도자인 바나바와 사울 또한 직접전하기 위해 간 것이다. 이들 모두는 그들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결코 아끼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다시 한 번 자기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나는 내 주변 형제, 자매들을 위해 무엇을 아끼지 않고 섬기고 있는 것인가?

성경에 보면 섬김의 왕으로 불리는 이가 등장한다. 그렇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분은 선택받은 주의 백성들을 위해 물질과 시간이 아니라, 생명주시기를 아끼지 아니하셨다. 아니, 개인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생명보다도 으로써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셨다는 점에서 정말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매주 설교를 통해 듣게 되는, 매일 성경을 통해 알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섬김 앞에 우리는 무엇을 드리고 있는 것인가? 아니, 무엇을 드리고는 있는 것인가? 우리 옆에 있는 이웃들을 돌아보자.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묻는다. 제일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신다.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의 입으로 말씀하신 계명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형제, 자매가 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 옆에 이웃이 어떤 상황인지,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알고 있는가? 1분이라도 좋다. 단돈 천원이라도 좋다. 우리의 시간을, 우리의 물질로 그들을 섬기자. 1분이, 단돈 천원이 그들을 살릴 수도 있다.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가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크게 하지 않더라도 그 모든 행동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한다면 그 작은 행동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당장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히 언젠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맺게 될 것이다. 그때를 기대하자. 그때를 소망하자. 그렇기 행하는 자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고, 오늘 본문을 통해 말하는바 끈끈한 교회 공동체인 것이다. 우리의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주님, 교회가 교회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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