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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4장 1-7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14장 1-7절

텔레울로스 2018. 3. 27. 17:35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1. 관찰: 본문 요약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말씀을 전하던 바나바와 바울 일행은 유대인들과 그들로 인해 선동된 자들에 의해 쫓겨나게 되었다. 이에 두 사람은 쿨하게 그곳을 떠나 이고니온으로 오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역시나 복음을 전하는 두 사람에 의해 유대와 헬라인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말씀을 받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이제 막 믿게 된, 연약한 자로 하여금 두 사도에게 대해 악감을 품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도는 위축되지 않고, 안디옥처럼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표적과 기사를 통해 말씀을 증언했다. 말씀이 증명됨에 따라 사람들은 두 무리로 나뉜다. 3절에서와 같이 복음을 믿고 사도를 따르는 무리, 두 사도에 대한 반감과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무리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무리는 두 사도를 가만두지 않고 모욕하며 돌로 쳐 죽이려 하자, 두 사도는 이고니온 또한 나가 루가오니아로 옮겨가 복음을 전한다.

#2. 해석: 본문 연구
사실 본문은 앞서 나누었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선교와 크게 다를 바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눈여겨볼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복음을 전할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복음을 거부하는 세력, 즉 사탄의 세력들이 사도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더 억압한다는 사실이다. 이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를 생각해보자. 유대인들은 처음에 바울이 말한 것을 단순히 반박했다면, 시간이 좀 흐른 후에 사람들을 선동해 두 사람을 박해하여 내쫓았다. 하지만 이고니온에서는 이보다 더 심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우선적으로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해 악감정을 품게 할 뿐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적 영향력이 커지자 이번엔 아예 죽이려 들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더 드러나는 곳에 사탄이 방해 또한 커지고 있다는 말이다.

#3. 적용 및 결단
우리의 현실 또한 이와 비슷한 원리가운데 있다. 예를 들어 선교지 같은 경우, 한국에서의 일상보다 영적 전투가 훨씬 잦고, 심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것도 지역 나름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열매를 볼 수도 있는 곳이 바로 선교지의 특성이다. 즉 하나님의 뜻이 더 가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에 그만큼 사단의 방해 또한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수치화해서 이야기하자면 반비례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나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뭔가 잘 되지 않고 꼬이는 것 같은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혹은 주관적으로 생각해도 분명 현재 자신의 영적 상태가 바닥임에도 불구하고 하는 일들이 잘 되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럴 때,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하게 자신의 상태를 판단해야 한다. 전자의 같은 경우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거나 우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단이 강하게 방해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후자인 경우, 스스로의 상태가 분명 아닌 줄 알면서도 뭔가 세상적으로 봤을 때 하는 일들이 잘된다면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해 빨리 판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럴 때 사단이 우리의 상황을 조정함으로 계속해서 영적 침체의 상태를 유지시키려 하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지금 말하는 모든 상황이 공식처럼 딱딱 들어맞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을 비춰 생각해봤을 때, 이러한 영적원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상당히 유용하다.
그러니 현재 자신의 상황을 살펴보자.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나에게, 주를 힘입어 살아가려는 나에게 오히려 온갖 어려움과 사람들의 손가락이 난무하는가? 사단의 영적방해가 극심한가? 결코 두려워할 것 없다. 이러한 상황은 훗날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자. 그렇기에 우리는 그만한 담대함과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면 된다. 맞닥뜨리면 된다! 바울 사도 또한 말하지 않았는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현재 우리를 감싸고 있는 고난의 상황을 더 이상 고난으로 받지 말고,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기대감으로 생각하자. 이 찬양의 고백이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의 고백이 되길 소망한다.

 

시작됐네 우리 주님의 능력이 나의 삶을 다스리고 새롭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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