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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4장 19-28절 본문

묵상

사도행전 14장 19-28절

텔레울로스 2018. 4. 3. 20:00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격해지는 사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사울과 바나바는 뜻을 굳히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다. 그랬더니 사울을 벼르던 온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몰려와 무리들을 충동해 바울을 박해한다. 스데반의 죽음을 옆에서 목격했던 바울이, 그와 동일한 모습으로 박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돌을 맞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는지, 무리들은 바울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성 밖으로 끌어냈다. 한 마디로 버림을 당한 것이다. 이에 바울의 제자들이그를 도와 회복시키고, 다음 날 바로 더베로 떠나게 된다. 더베로 간 바울은 몸이 성치 않았음에도 복음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후 전에 들렸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안디옥으로 돌아가 전에 사람들을 격려하며, 계속해서 순례의 길을 갈 것을 권면한다. 아마 이곳에서 바울은 자신이 겪었던 것들을 나누며 믿음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 환란이 있어도 끝까지 참고 견딜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강조했던 것 같다. 그는 각 지역 교회에서 장로들을 세우고, 금식으로 공동체를 더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 버가에서 말씀을 전하고 이탈리아로 내려가 처음 파송을 받았던 이방인의 전진기지인 안디옥에 이르게 된다. 바울은 그곳에서 교회로 부름받은 많은 동역자들을 모아 복음과 더불어 1차 전도여행에서 자신이 겪었던 이방인 구원과 관련된 많은 간증을 나눔으로 은혜를 공유하며 제자들과 오랜 시간 교제를 나누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복음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사단의 방해공작 또한 교활하며 치밀해지고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흐름에서 나누었다. 동시에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교회의 공동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죽음에 이르게 된 바울, 만일 그가 혼자였다면 과연 루스드라를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을까? 20절을 보면 바울의 제자라고 불리는 자들이 둘러섰을 때, 바울이 일어났다. 제자들이 둘러섰다는 표현은 그들의 도움 아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위기 가운데 공동체적인 돌봄이 있었기에 바울은 회복할 수 있었고, 무사히 더베로 건너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타난다.
더베에서 복음을 전하고 난 그의 다음 선교지는 어디였는가? 직전에 죽음에 이를 뻔 했던 그곳, 바로 루스드라였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전에 겪었던 트라우마로 인해 위험을 경험했던 특정 장소를 피하기 마련일텐데, 그는 오히려 제 발로 들어갔다. ? 복음을 받아들였던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그곳에 있던 제자들은 아마 두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던, 스승과도 같았던 바울이 죽음에 이르는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식했던 바울은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곳에 들어갔던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는 루스드라에 이어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들러 루스드라와 마찬가지로 이전에 복음을 받아들였던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 격려했다. 비록 자신과 같이 큰 환란과 박해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주기 위해서였다. 바울에게 있어 복음은 단지 자신만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아니라, 연약한 믿음을 가진 형제들을 격려하며 그들과 함께 손에 손잡고 저 천국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교회의 공동체적인 모습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본문의 하반절에서 교회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버가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온 바울은 즉각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 쉼을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동역자 한 명 한 명을 불러, 자신의 간증을 통해 직접 경험했던 복음을 나누었다. 교회란 바로 이런 곳이다.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님을 나누는 공동체, 자신이 깨달아 알게 된 복음을 나누는 공동체, 죽음에 다다르게 되었던 경험일지라도 함께 나눔으로 두려웠던 기억마저 은혜로 승화시키는 공동체, 형제가 만난 하나님을 들어줌으로 간접적으로 은혜를 경험하는 공동체, 형제의 아픔을 들어주는 공동체, 함께 웃고 우는 공동체. 그것이 바로 교회의 참된 모습인 것이다.

 

본문에서 보여 지는 교회의 공동체적인 모습 앞에 우리의 교회는 지금 어떠한가?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만연해있는가? 아니면 세상에 반하여 자신의 것을 나누고 사랑을 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시간이 흐를수록 정은 사라지고 배려라고는 보이지 않는 이 세대가운데, 교회만큼은 있는 것을 함께 나누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사탄은 시시때때로 교회를 노리고 있다. 불완전한 인간 세상에서 교회마저 세상의 여느 집단과 다르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그곳에서 교회 공동체의 구별됨을 결코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단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함으로 교회의 공동체 됨을 드러냈던 바울과 같이, 우리 또한 먼저 복음을 받은 자로써 세상의 이기주의, 개인주의에 반하여 주변에 가난하고 힘든 자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 교회의 공동체적인 모습을 세상에 보여야 할 것이다. 복음은 결코 개인주의, 이기주의적이지 않다.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퍼져나감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교회 또한 단순히 믿음 있는 특정한 자들만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믿음의 유무를 떠나 주님 알기 원하는 자들 모두를 위해 열려 있는 공동체이다.

사도행전 2장을 돌아보자. 처음 그곳에 성령이 임해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고 나누며 하나 됨을 보여준 그들처럼 우리 또한 아름다운 그 모습을 소망하며 이 시대에 성경적인 교회가 남아 있음을, 살아있음을 세상에 드러내자. 그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실 것이며 이 땅의 교회는 교회됨을 온전히 회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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