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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eoulos

사도행전 19장 1-7절 본문

묵상/44. 사도행전

사도행전 19장 1-7절

텔레울로스 2018. 7. 2. 16:56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1. 관찰: 본문 요약
본문은 이제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시작을 알린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18:23으로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이 마무리되었으나, 24-28절까지 아볼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니 다시금 19장에 들어서면서 그 중심인물이 바울로 바뀌었다.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확실치 않지만 바울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으로부터 윗지방을 다니다가 이제 에베소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 있던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만남을 가졌는데, 그때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파악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묻는 것이 바로 2절이다.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 이에 제자들은 말한다. 우린 성경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곧이어 바울은 묻는다. 그러면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요한의 세례입니다.” 이에 바울은 제자들에게 세례를 준 요한의 세례에 대한 설명한다. 바울이 이해했던 요한의 세례는 후에 있을 예수님의 세례의 준비이자 기대였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승천 이후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진정한 세례는 성취의 의미를 띈 성령세례였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받았는데 성령의 임재가 보이지 않는다면 진정 세례를 받았다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더 이상 준비와 기대를 뜻하는 요한의 세례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진단이 아주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안수를 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

#2. 해석: 본문 연구
오늘의 본문은 당시 에베소 교인들이 상태를 자세히 보여주는 동시에 오늘날 교회의 교역자,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총체적으로 제시해주고 있다. 교회를 바로 세우고 위해 선교여행 중인 바울에게 본문에서 드러난 특별히 모습은 바로 올바른 영적 진단이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던 제자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알아차렸던 것 같다. ,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구나 그래서 2, 3절과 같이 직설적으로 물어봤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성령에 대한 지식이 아예 없었다. 무지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현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사역을 하다보면 종종 착각에 빠져 살아가는 교인들을 보곤 한다. 자신이 교회에 오래 출석했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아는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 단순히 섬김의 자리를 오래 지켰다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 또한 성경을 많이 읽기만 하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분. 물론 방금 언급한 분들의 행실을 두고 감히 내가 왈가왈부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모습과 상반되는 그들의 삶의 행태를 보면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저분은 진정 중생한 자인가?’ 그들에게 보여 지는 것과 삶이 너무나도 상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기에, 이 땅에 살아가는 교역자들은 먼저 깨어서 이들을 보며 명확하게 진단하고 오늘 바울이 제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다가가 깨우쳐 줘야 한다.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 요한이 말했던 자가 곧 예수라 이는 교역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동일하다. 자신이 먼저 깨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깨울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먼저 깨어 있어야 앞에 있는 불신자를 올바로 진단하고 예의적절하게 복음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진단은 올바른 정신에서 가능한 것이다.

 

다음으로 본문에서 집중해야 할 것은 이 세대에 성령세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보면, 특별히 군대에 있는 교회에서는 한 번 세례를 베풀 때 엄청난 수의 병사가 지원을 한다. 지역마다, 부대의 규모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상식이상의 수가 세례를 받겠다고 자원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결론은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 안에서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받는 자가 몇이나 될까? 그들이 세례 받은 자로써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안타깝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는 군 교회에서 특별히 눈에 띠는 것이지 일반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세례를 받은 교인들의 삶을 보면 정말 그들이 교회 공동체의 진정한 회원인가 싶을 정도로 의심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 좀 다녔다고 하는 자들 대부분은 거의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세례를 받은 것까지가 그들의 현실 모습일 뿐, 전혀 중생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물론 중생과 세례는 분명하게 다른 개념이다. 다만,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교회에 정녕 필요한 것은 단순 물세례 예식, 하나의 예식에 불과한 것 말고 진정 성령세례라는 것이다. 성령님의 임재가 너무나도 절실하다는 것이다(그렇다고 물세례에 대해 평가 절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3. 적용 및 결단
말씀을 정리해보자.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2가지 영적 필요를 요구받는다. 첫 번째는 올바른 영적 진단을 할 수 있는 깨어 있음이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는다면 결코 세상을 깨울 수 없다. 성경을 볼 때 (특정한 인물들을 제외하고는)하나님께서 쓰임 받은 인물들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부족해보이고 연약해보이지만, 그 누구보다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기 위해 발버둥치려 했던 자들이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 반드시 선행되어 있어야 한다. 어두운 곳을 밝히기 위해서는 아무리 작아도 반드시 불빛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두 번째는 교인들의 중생을 향한 간구이다. 단순히 무언가를 얻기 위한 어린아이와 같은 기도를 제외한다면, 영적인 깨우침을 위한 개인 간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를 위해, 우리 옆에 있는 교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더 나아가 불신자들을 위한 기도도 좋다). 다만 그 간구는 명확해야 한다. 단순히 그들이 교회에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단적, 일시적 기도가 아니라 그들이 진정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더 이상 피상적인, 숫자만 늘어나는 교회 공동체가 아니라 진정 중생한 자들이 모인 공동체를 위한 기도인 것이다.
2가지 요구는 교역자를 포함해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임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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