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일상 (59)
Teleoulos
목회자에게 있어 설교는 가장 기본이자 핵심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종종 바쁜 사역으로 인해 물리적인 준비 부족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죄인과도 같은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설 때가 있다. 또 어떨 땐 이미 고착화된 형식으로 준비하다보니 틀 안에 넣고 더 고민하려 하지 않아 하나님 앞에서 죄인과도 같은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설 때도 있다. 또 어떨 땐 영/육의 지침으로 '이정도면 되지 않나?'라는 생각으로 적당히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과도 같은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설 때도 있다. 마지막으로 더 철저히 준비하고 싶은 마음에 최선을 다하다가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노력으로만 하는 내 모습을 보고 낙심하여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허탈한 내 모습을 미워하다가 그 자리에 설 때도 있다. 그 외 사람..
수도권 거리두기 4단계로 인해 처음으로 시작된 비대면 수요예배 오늘은 캐릭터 확실하신 동역자, 최목사님의 설교였다. 본문은 너무 흔하디 흔한 사사 삼손, 그리고 제목은 '머리털 신앙'이었다. 사실 아직 나에겐 쉽지 않은 영역의 대중적인 본문 설교. 오늘 설교도 본문만 두고 볼 때는 '뻔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집중하며 듣다보니.. 어느새 깊은 몰입감으로 푹 빠져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최목사님의 핵심은 결국 '머리털은 상징일 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다. 사실 삼손은 들릴라와의 사건 이전에 나실인의 규례를 이미 범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가 어떠한 이유로 자신만만했고 여전히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 걸까? 결국 '머리카락'이 여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머..
곧 초등부에서의 구약설교도 이번 주를 포함해 2번 남았다. 모든 성경을 다 가르치고 선포하고자 하는 나의 교육관에 따라 신약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이상하리만치 산상수훈(팔복)에 대한 마음이 생기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갈망인 건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인지는 조금 더 디테일하게 살펴봐야겠지만 이미 참고서적까지 구매한 나에게 있어 이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다만, 여전히 어렵사리 초등부 설교에서 절별 설교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보다 '두려움'이 서려있음을 보게 된다. 1) 과연 내가 짧으면 20분, 길면 30분정도인 시간에 초등부를 향한 절별 설교를 할 수 있을까? 2) 무리가 아닌, 제자들을 향한 산상수훈이 이들에게 바람직할 것..
제일 바쁜 주일, 사역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나의 반쪽 아내와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근처 저수지를 다녀왔다. 원래 세살배기 체력이 이정도였나? 도무지 지치지 않는 아들, 지치는 건 나였다... 집으로 돌아와 쉴 틈 없이 아들 저녁을 먹이고 씻기고,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보통 같았으면 저녁 먹을 그때, 찬양이든 노래든 재미있는 영상이든 잠시 웃을 수 있거나 나름 생각없이 볼 수 있는 것들을 반찬으로 식사를 했을텐데 왠지 모르게 이끌려 갔던 검색어 '노진준목사님' 식사하는 시간이야 보통 10분 내외이기에 가능하면 짧은 설교말씀을 찾아봤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9분 가량의 영상. 사실 설교영상이라고 하기보다는, 어떤 설교영상의 엑기스를 따로 편집해 대본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냥..
계속해서 늘어지는 독서생활 초반에 집중하다가 잠시 끊어지고, 다시금 집었다가 늘어지고의 반복... 늘어짐을 널어 게으름이 찾아옴을 직감한 나는 다시금 알렌 그라이더의 '회심의 변질'을 의도적으로 집었다. 진도를 빼기도 했지만, 왠지 모를 끌림으로 다시금 돌아보게 된 '저스틴과 키프리안의 회심' 그들의 삶에서 드러난 진정 기독교의 입문에는 바로 '한 사람'이 있었다. 저스틴에게는 외모가 전혀 볼 품 없는(?!) 노인(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유대 그리스도인이 있었고, 키프리안에게는 스승이자 친구인 케실리아누스가 있었다. 철학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 원했던 저스틴은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지성적 회심을 경험하고, 상류층에 있던 키프리안은 케실리아누스와 그가 속해있던 공동체를 통해 모든 것이 사치였음을 깨닫게..
사람들은 각기 다르다. 이는 목회자들도 예외는 다르다. 그러나 목회자가 평신도와 다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주의 '사랑'으로 인한 포용이다. (물론 평신도도 동일한 맥락에 있긴 하다) 요즘 편이 나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너무 어렵다. 물론 편이 나뉠 순 있다. 서로 더 친한 사람들이 다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가만보면 친해서 편이 된 것도 아니다. 공통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음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친한 사람들로 묶여있는 것처럼 보일 뿐. 서로가 다르면 다른 데로 대화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텐데, 서로가 다르면 그러냐며 적어도 손가락질을 하진 않을 수도 있을텐데, 이러냐 저러냐 대화는 커녕, 다름도 인정하지도 않고 마냥 불편한 시선X, 편견으로 바라보는 이 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4:12)' 아멘. 은근히 기대되었던 금요기도회, 인간의 예측할 수 없는&하나님의 준비된, 그만한 이유가 있던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한창, 제목과 같이 헤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일 3:13-24에서 답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2가지였다. ➀내가 하는 일에 대해 하찮게 여겨서 ➁내가 만나는 사람을 그냥 지나쳐서 한창 뜨겁게 달려나가던 나의 모습 속에서 어느 순간 민감함과 열정이 식은 것 같고, 한창 부딪힘으로 주님의 마음을 알았던 나의 모습 속에서 어느 순간 게을러 진 것 같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때 그때 ..
여전히 치열한 전쟁이 펼쳐지는 하나 됨. 문득, 오늘 금요설교를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깨닫게 하신 2가지 하나님의 뜻. ⁍ 주님께서는 내가 'OO마저 안아야 하는 겁니까?'가 아니라, 'OO부터 안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 주님께서는 내게 OO에서마저 먼저 '덕'이 우선임을 말씀하셨다. (철저히 죽이시는...) 답을 주셨다. 물론 답을 안다고 다 끝나는 건 아니다. 결국 이 답이 나의 삶이 되기까지의 훈련이 필요하고, 능력이 필요할 뿐. 그렇기에.. 반은 기쁘면서도, 반은... 물음표다. 물론 감동을 주신 분이 주님이시기에, 이끄실 것도 주님께서 하실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유'를 알게 하신 것에 감사하려 한다. 여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주님, 제 삶을 이끌어 주..
하루를 마감하는 시점은 아니지만.. 당장 내일의 나를 위해 기록하는 중간 평가의 일기. 스케줄적으로는 빡빡하지 않고 평소보다 널널하게 준비한 주일학교 설교였는데, 오히려 되레 이 넉넉함이 독이 된 느낌이다. 본문선택에 조금 더 신중함을 더하고, 짜임새를 조금 더 갖추고, 부서 학생의 입장에서 조금 더 고민하고, 그들이 더 적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리하고, 한 번 더 수정을 거쳐 완성도를 높였어야 했는데, 스스로 '이정도면 되겠지...'라는 마음이 나를 사로잡았다. 결론적으로 '안이했다.' 종종 은혜를 끼치고도 찝찝한 경우가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가 보다. 돌아오는 주부터 결코 그러지 않기 위해 다시금 결단의 간구함으로 마무리해야겠다. 주여, 저의 마음을 붙드시사 주님 앞에서 더 부지런하게, 성실하게..
한동안 '죄'에 깊이 빠져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어 방황하던 내게, 긍휼함의 의지가 찾아왔다. 그 의지로 난 고전 중의 고전, 존 오웬의 '죄 죽이기'를 주문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편 본서는 역자의 해제(서적·작품의 저자·내용·체재 등에 관한 간단한 설명)로부터 시작된다. 그동안 많은 해제와 같은 글을 읽어봤지만, 이렇게 정성을 다해 신학적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해제 안에서 점진적으로 발전되는 반복에서 지루함이 아닌 '이미 시작되었군'의 마음이 생겨났으니 말이다. 가만보니 해제 안에서만 이미 밑줄 친 부분이 1/3이나 될 정도로 (내게)가볍지 않고 오히려 깊었다. 더 기대가 되는 점은, 한 때 내가 정말 중요하게 여겼던 주제인 '죄'에 대해 다시금, 아니 어쩌면 더 깊은 경각심을 갖게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