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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eoulos
기나긴(?!) 창세기 여정을 마무리하며, 이제부터 수 4:21-24의 말씀을 살피게 된다. 본문은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길갈의 돌을 기념하라고 하신 내용이다. 사실 본문은 일반적으로 내용이 정해져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묵상의 풍성함이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본문 안에서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며 앞으로 시작될 대서사시(?!)의 서론을 연다. 앞선 창세기 말씀을 통해 '부흥'이라는 주제의 방해물에 대해 살피고, 본문을 통해 '부흥'의 조건과 규칙을 살핀다. 특별히 저자는 이 사건을 하나의 예로 시작해, 역사가운데 드러난 부흥의 모습을 전반적으로 돌아본다. 하나님께서는 왜 길갈의 돌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는가? 이 부분에서 저자는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계속해서 잊..
Chapter4, 5 또한 여전히(?!) 창세기 26:17-18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앞선 단락과 더불어 블레셋이 막은 우물에 대해 설명하며, 오늘날 무엇을 막고 있는지 말한다. 특별히 Chapter4에서는 성령의 제한에 대해, Chapter5에서는 교리를 목적으로 삼는 것에 대해 강력히 선포한다. 사실 개혁주의에서는 Chapter4에 대해 논쟁이 있다. 성령세례가 있다. vs 없다. 사실 결과적으로는 다시금 오순절과 같은 모습은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기에, 개혁주의에서는 이 점을 두고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백금산 목사님께서는 이에 대해 그의 본의를 오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논평한다. 나 또한 이점은 백목사님과 동일한 관점이다. 그때와 동일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성령의 주권적인 임재가 ..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설교문답게, 앞선 2장에 이어 3장 또한 창 26:17-18에 대해 다룬다. 이번 단락에서는 이삭이 파려는 우물을 블레셋이 막았다는 점에 포커싱을 맞추고 있다. 블레셋이 우물을 막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앞선 단락과 연관시켜 생각해야 한다. 이삭이 우물을 팠다는 것은 삶의 가장 기본이되는 '물'을 우선적으로 찾기 위함이었고, 그러기위해 다른 것보다 이전에 아버지세대에서 팠던 우물을 다시 찾아 파려했다. 이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물의 공급책을 확보하려 했다는 것이고, 오늘날로 말하면 세상의 다양한 방식으로 하려했던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되어지고 신앙의 선배들이 붙들었던 진리를 다시 붙들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삭은 우물을 다시 파려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미 전제..
창 26:17-18로 시작된 두번째 파트.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로 소유가 불어나 자신이 있던 곳에서 쫓겨난 이삭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본문에서 집중해야 할 부분은 2가지이다. 1) 이삭이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다시 팠고, 2)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블레셋이 막았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곳으로 이주한 이삭. 그가 맨 처음했던 것은 무엇인가? 바로 물을 찾는 거였다. 물이란 무엇인가? 삶에 있어 기본이자 필수 요소이다. 저자는 바로 이점에서부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과연 '물'을 찾고 있는가? 물 찾는 것을 가장 기본으로 해나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곧이어 이삭은 새로운 곳으로 떠나 물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보면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물을 찾는 데 있어, 그의 수많은 ..
목회자들을 향한 백금산 목사님의 서적을 짤막하게 접한 후, 다시 손에 들게 된 서적 '부흥' 본서는 나의 영적 스승이신 M.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명작이다. 본서는 내가 약 3년 전쯤, 처음 접했던 서적으로 당시에도 가히 충격적인 은혜가 있었다. 직관적으로 기억하자면.. 아마 하나님께 떼쓰는 모세의 모습, 동시에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모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모세의 당돌함을 몇 번이나 찾아보고 설교 때도 인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엔 백목사님의 추천으로 20세기 복음주의 최고의 설교자라 할 수 있는 스승님의 서적을 다시 봄으로써, 내 영이 다시금 깨어나며 목회자로써 마음을 다가듬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1장은 막 9:28-29에서 드러난 상황을 통해 오늘날에..
제일 바쁜 주일, 사역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나의 반쪽 아내와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근처 저수지를 다녀왔다. 원래 세살배기 체력이 이정도였나? 도무지 지치지 않는 아들, 지치는 건 나였다... 집으로 돌아와 쉴 틈 없이 아들 저녁을 먹이고 씻기고,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보통 같았으면 저녁 먹을 그때, 찬양이든 노래든 재미있는 영상이든 잠시 웃을 수 있거나 나름 생각없이 볼 수 있는 것들을 반찬으로 식사를 했을텐데 왠지 모르게 이끌려 갔던 검색어 '노진준목사님' 식사하는 시간이야 보통 10분 내외이기에 가능하면 짧은 설교말씀을 찾아봤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9분 가량의 영상. 사실 설교영상이라고 하기보다는, 어떤 설교영상의 엑기스를 따로 편집해 대본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냥..
계속해서 늘어지는 독서생활 초반에 집중하다가 잠시 끊어지고, 다시금 집었다가 늘어지고의 반복... 늘어짐을 널어 게으름이 찾아옴을 직감한 나는 다시금 알렌 그라이더의 '회심의 변질'을 의도적으로 집었다. 진도를 빼기도 했지만, 왠지 모를 끌림으로 다시금 돌아보게 된 '저스틴과 키프리안의 회심' 그들의 삶에서 드러난 진정 기독교의 입문에는 바로 '한 사람'이 있었다. 저스틴에게는 외모가 전혀 볼 품 없는(?!) 노인(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유대 그리스도인이 있었고, 키프리안에게는 스승이자 친구인 케실리아누스가 있었다. 철학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 원했던 저스틴은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지성적 회심을 경험하고, 상류층에 있던 키프리안은 케실리아누스와 그가 속해있던 공동체를 통해 모든 것이 사치였음을 깨닫게..
사람들은 각기 다르다. 이는 목회자들도 예외는 다르다. 그러나 목회자가 평신도와 다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주의 '사랑'으로 인한 포용이다. (물론 평신도도 동일한 맥락에 있긴 하다) 요즘 편이 나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너무 어렵다. 물론 편이 나뉠 순 있다. 서로 더 친한 사람들이 다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가만보면 친해서 편이 된 것도 아니다. 공통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음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친한 사람들로 묶여있는 것처럼 보일 뿐. 서로가 다르면 다른 데로 대화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텐데, 서로가 다르면 그러냐며 적어도 손가락질을 하진 않을 수도 있을텐데, 이러냐 저러냐 대화는 커녕, 다름도 인정하지도 않고 마냥 불편한 시선X, 편견으로 바라보는 이 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4:12)' 아멘. 은근히 기대되었던 금요기도회, 인간의 예측할 수 없는&하나님의 준비된, 그만한 이유가 있던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한창, 제목과 같이 헤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일 3:13-24에서 답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2가지였다. ➀내가 하는 일에 대해 하찮게 여겨서 ➁내가 만나는 사람을 그냥 지나쳐서 한창 뜨겁게 달려나가던 나의 모습 속에서 어느 순간 민감함과 열정이 식은 것 같고, 한창 부딪힘으로 주님의 마음을 알았던 나의 모습 속에서 어느 순간 게을러 진 것 같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때 그때 ..
13:14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13:15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13:16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 제자도의 우선적 원리 #1. 관찰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앞으로 제자로써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말씀하신다. 그 답은 분명하다. ‘예수님처럼’ 이렇게 살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관계에 대해 분명하게 정립하신다. 이러한 원리를 알고 행할 때 제자로써 살아가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2. 해석 예수님께서 말씀하..